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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때하자 May 14. 2022

단권화 정리는 필수인가요?

  여느 공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정권교체기에 여러 업무에 휩쓸리다가 돌아왔다. 지난달에는 벚꽃을 만끽하지 못하고 봄을 보내는 것이 아쉬워 혼자 밤마실도 나가고 애써 천천히 걷곤 했는데, 벚꽃이 떠난 자리에는 아쉬움 대신 푸른 신록만이 남았다. 요즘은 유독 푸른 나무들이 예뻐 보인다.


  어제(5월 12일) 67기 연수원생들이 진천 연수원에 입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난 2년 간은 코로나로 인해 17주간의 합숙 연수 대신 비대면 연수가 진행되었는데, 그게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그때가 직장동료가 아닌 '친구'를 사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자, 은퇴 전 제대로 놀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기사.. 300명 넘는 인원이 한 공간에서 4달간 생활하는데 재미없을 리가.. ㅎㅎ

  여러분들도 (직급에 따라 연수받는 기간은 다르겠지만) 합격 후에는 진천 연수원에 입소하게 될 텐데 그날을 그리며 마음을 다잡기 바란다.


단권화 정리는 반드시 필요한가요?

  항상 중요한 이야기만 해왔지만, 오늘 역시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고자 한다. 단권화 정리는 공부량이 많은 시험을 준비하는 누구나 한 번쯤 하는 고민이다. 행정고시나 7급, 9급 공채 역시 마찬가지다. 과목마다 소화해야 하는 양이 많다 보니 한 과목 내에서도 여러 책을 참고할 수밖에 없고, (나는 행정법 공부할 때 교수님 교과서 네 권을 동시에 펼쳐놓고 비교한 적도 있었다. 굉장히 큰 책상이 필요했다) 준비해야 하는 과목도 많아서 (행시 기준 5과목) 단권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열댓 권의 책을 쌓아놓고 공부해야 하는 참사가 일어난다.

  그렇지만 단권화 정리는 (책상 정리처럼) 좀처럼 끝나지 않는 지난한 작업이다. 자칫하면 내가 공부를 하는 건지, 책 한 권을 새로 집필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주객이 전도되기 일쑤다. 4년이 넘는 수험기간 동안 단권화를 수차례 해보았고, 단권화 작업으로 끝을 보았던 입장에서 몇 마디 조언을 남기려 한다.



1. 불안함은 단권화를 낳는다


  시중에는 참 많은 수험서가 존재한다. '경제학 입문', '행정법 개론'과 같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교수님 저서부터 시작해서 학원강사의 기본서, 핵심정리, 기출문제집 등 한 과목 내에서도 이루 셀 수 없을 만큼의 책이 존재한다.

  그 어느 책도 딱 내 마음에 들기는 어렵다. 내가 쓴 책이 아니니 그럴 수밖에. 게다가 책마다 '좋은 파트'와 '나쁜 파트'가 존재한다. 같은 과목 교과서라도 교수님의 세부 전공에 따라 강한 파트와 약한 파트가 나뉘는 건 당연지사다. 초시생 때는 개념을 이해하느라 급급하겠지만, 어느 정도 공부 짬(?)이 쌓이다 보면 점점 여러 책의 장점을 취합한 나만의 단권화 노트를 갖고 싶어 진다. 이제 하나의 실패(?) 사례를 살펴보자.

   

  나는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책상 정리를 싹- 해야 하는 성격인데 (그래서 공부를 안 할 때는 책상도 엉망이다) 내게 단권화란 '공부 시작하기 전에 해야 하는 작업'으로 인식되었다는 점에서 책상 정리와 같았다. '단권화 노트만 완벽하게 만들어서, 이후에 수백 번 반복해 읽어야지'라는 생각이었다. 처음 내 목표는 미시/거시 경제학을 B5용지 20페이지 내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정말 나는 용감무쌍했다. 인생은 실전이라고 했던가, 2주 내에 완성하겠다는 당초 계획과 달리, 단권화 노트는 2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았고 결국 300페이지를 넘기고 나서야 완성(?)되었다. 대장경판에 활자를 새기는 고려시대 승려의 심경이 이러했을까. 나는 완성된 경제학 단권화 노트의 이름을 '팔만대장경제학'이라고 지어주었다.


팔만대장경제학의 일부. 빈 B5 용지에 손으로 정리했다.

  300페이지의 단권화 노트는 말이 단권화지, 그동안 배운 모든 내용을 때려 넣은 자료에 불과했다. 단권화를 하는 취지는 맞춤형 '핵심 정리서'를 만드는 데 있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요약에 실패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공부 연차가 쌓이면서 그때그때 수집한 낯선 개념들, 정말 불의타로 나올만한 주제들까지 정리하다 보니 분량은 끝없이 늘어났다.


  그런데 어떻게 시험에 붙었을까? 정말 다행히도 나는 행정법, 행정학, 정치학에 있어서는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역설적이지만 '치열하지 않았기에' 실패하지 않았다. 무슨 얘기냐고?

  내게 경제학은 취약과목이었다. 수에 약한 편이 아닌데도 개념이 흔들리기 일쑤였고, 이해가 안 되는 이론도 너무 많았다. '효용을 극대화하고 비용을 극소화한다'는 기본 중의 기본을 오롯이 이해하기까지 수년이 걸렸다. 분명 풀었던 문제인데 다시 풀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고, 이론들은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섞여버렸다. 항상 개념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불안했다. 개념을 간명하게 정리하고 싶었다. 개념 정리에 대한 욕망은 어느새 나를 승려로 만들었다.

  그렇지만 상대적으로 논문 과목에는 자신이 있었기에 직접 수작업으로 단권화 노트를 만드는 과오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대신 선배들이 정리한 단권화 노트나 (그들 또한 과오를 저지른 것..) 학원에서 준 요약서 등에 살을 붙이는 방식으로 단권화를 진행했다.

  단권화에 대한 갈증은 실은 '개념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해당 과목의 기본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에 명쾌하게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끝없이 드는 것이다. 공부 연차가 짧을수록 단권화에 큰 욕심을 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단권화의 필요 여부를 떠나, 단권화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온다면.. 내가 기본 개념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자.


2. 단권화가 필요할 뿐, 단권화 정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권화를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다. 불안함이 원인임은 별론으로 하고, 호흡이 길고 양이 방대한 공부를 할 때 단권화 작업은 분명 필요하고 중요하다. 당장 시험 당일에 들고 갈 '한 권'의 책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공부할 때 봤던 모든 책을 리어카에 싣고 시험장까지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권화는 필요하지만 그 의미가 곧 '내 손으로 정리한' 단권화 노트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시중의 수험서 하나를 중심으로 삼아 필요한 내용을 추가로 메모하거나, 빠진 내용을 끼워 넣는 식으로 정리하는 단권화로도 충분하다.

  간혹 선배로부터 또는 복사집에서 (용감무쌍한) 누군가가 과목의 개념을 요약해둔 자료를 구할 기회가 있다. 이 또한 남이 쓴 자료라 처음에 펼쳐보면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실상은 내게 익숙하지 않은 자료라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말인즉슨, 그 자료의 퀄리티가 낮은 게 아니라 아직 자료와 친하지 않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낯선 자료와 친해지는 것이 내가 스스로 자료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시간이 적게 드는 길이다.


  그러나 제삼자의 단권화 노트를 구하지 못했을지라도 낙담하지 말자. 없어도 괜찮다. 시중의 수험서(학원 교재) 중 한 권을 골라 단권화하면 그만이다. 참고로 내 사례와 주변 사례를 미루어 보았을 때 '핵심 정리집'같은 책보다는 '기본 개념서'가 단권화에 더 적합하다. (3순환 교재보다 예비순환, 1순환 교재가 더 낫다)

  분량도 많은데 뭐가 좋냐고? 분량을 압축해둔 요약집에 단권화해봐야 결국 필요한 내용을 추가로 적는 데 허송세월 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중요한 개념들이 충실히 담겨있는 수험서가 단권화하기에 적합하다. 책이 두껍다고 두려워 말자. 단권화 자료는 분량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료와 내가 얼마나 친숙했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자료를 꼭꼭 씹어 이미 소화시킨 상태라면 분량이 많아도 빠르게 읽을 수 있고, 반대로 여전히 낯선 자료라면 분량이 적어도 오래 걸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양이 부족한 교재보다는 양이 많은 개념서가 차라리 낫다.

  나의 필생의 역작 '팔만대장경제학', 300페이지가 넘는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합격하던 해에는 30분 내에 한 차례 회독이 가능했다. (이미 이해하는 내용은 가볍게 훑고 군데군데 여전히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만 선택적으로 읽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3. 그래서 단권화는 어떻게 해요?


  첫째, 단권화할 교재를 찾아야 한다. 어차피 시중의 교재는 무엇을 고르든 조금은 부족한 점이 있고, 단권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보충이 가능하니 너무 완벽한 책을 찾으려 애쓰지는 말자. 내가 수강하는 강사의 교재든 시중에서 마음에 드는 교재든 관계없다. 다만 페이지 내에 여백(좌우든 위아래든)이 있는 교재가 좋다. (안 그러면 물리적으로 정리할 공간이 생기지 않아 골치가 아파진다) 즉, 내용이 너무 빈약하지는 않되 적당한 여백이 있어 커스터마이징하기 좋은 책이 좋다. (경험상 현재 수강하는 학원강사의 교재를 선택하는 게 무난하다)


  둘째, 공부하면서 중간중간 부족한 파트를 보충하되 언제든 수정이 가능하게 정리하자. 어떤 교재를 단권화의 타깃(?)으로 삼았든 간에 상대적으로 빈약한 파트는 존재한다. 빈약함의 원인이 교재에 있든 나의 이해력 부족에 있든 아무튼 보충해야 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런 부분은 공부하면서 채워나가자. 나는 포스트잇을 붙여 내용을 보충했다.


행정법 단권화 노트. 포스트잇을 적극 활용했다


  경험상 책에 바로 필기를 해버리면 훗날 수정하고 싶을 때 곤란해졌다. 비가역적으로 정리하다가는 나중에 보충하거나 수정하고 싶을 때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만들고 싶은 충동이 들 수 있다.

  한 가지 더 유의할 점은, 공부하면서 틈틈이 정리하는 것이지 정리가 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단권화는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책상 정리처럼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끝마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부가 되어야 무엇을 정리해야 하는지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리를 마친 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지 말고, 공부하면서 틈틈이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자.


  셋째, 완벽을 추구하지 말자. 세상에 완벽한 교재가 없듯이 완벽한 단권화 노트 또한 존재할 수 없다. 아무리 내가 만든 자료라고 할 지라도 공부를 거듭하다 보면 그 자료가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다. 만약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생각해보자. 초시생 때 정리한 자료가 합격한 이후에도 완벽해 보일 리는 없지 않은가? 내공이 깊어질수록 앞서 정리한 자료가 빈약하게 느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고, 그렇기 때문에 오류가 없는 자료를 만들고자 노력하되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정리를 하다 말라는 이야기냐? 하면 그건 아니고, 정리만 하다가 공부할 시간을 다 날려버리지 말라는 이야기다. 미완의 자료를 들여다봐야 하는 고통을 잘 안다. 군데군데 부족한 부분이 보일 것이고, 더 채워 넣고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개념 이해와 암기이지 정리가 아니다. 자료를 완벽하게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정작 공부를 등한시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말자.  

  하루 1시간이든 2시간이든 정리에 쓰는 시간을 물리적으로 제한하자. 그 이외의 시간에는 개념 이해와 암기를 해야 한다. 아직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단권화 자료라도 습관적으로 매일 조금씩 다시 읽자. 정리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이해와 암기를 시작하겠다고 마음먹었다가는 영원히 이해와 암기를 못하는 수가 생긴다. 누차 말하지만 여러분이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도 완벽한 자료는 얻기 어렵다. (세상에 완벽한 수험서가 있었다면 개정판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다른 수험서는 출간도 되지 않았겠지. 하물며 헌법도 시간이 지나면 개헌된다) 개정되지 않는 것은 성서뿐이다.     


  



  주위를 보면 효과적인 공부를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만 효율적인 공부를 고민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다. 빈틈없는 단권화 자료가 있다면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겠지만, 자료를 만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효율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명심하자. 빠른 합격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공부를 고민해야 한다.

  오늘도 또 다른 대장경을 만들고 있을 고시촌의 수많은 승려들에게 선배 승려(?)로서 이 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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