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썰
하루를 온전히 앓아 누웠다. 편두통이 입을 크게 벌려 나의 하루를 잡아 먹은 셈. 전례없는 편두통에 나는 그 원인을 알아내보려 하였고 확인되지 못할 추정을 머금고 글을 시작한다.
공연 '몸풀기_비수기 전지훈련'은 공연의 탈을 쓴 공연아닌 공연같은 공연이다. 공연의 탈을 썼다는 것은 입장시 티켓비를 내고 출입을 허락 받았기 때문이고, 공연이 아닌 느낌은 연습실(리허설)에서의 루틴을 똑같이, 그대로 밟았다는 점에서, 특히 새로이 안무된 것이 결코 없었기에 풍기는 느낌이었으며, 공연 같았다는 것은 퍼포머들의 상태가 지금 여기에서 벌어지는 공연의 일반적 풍경과 같이 보는이와 나타나는 이로 나뉘어 서로의 역할에 기대되는 얇은 긴장감과 형식적임, 관객에게 하는 다소 말스러운 대사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면에서 공연같다 하겠다.
요약하자면 이 공연은 비수기인 지금 전지훈련을 비유삼아 기존에 해 왔던 몸풀이를 집중적으로 답습하고 공유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시간이었다. 때문에 몇십년간 이루어졌던 연습실 루틴(기본-자진모리-재동작-레퍼토리로 이어지는)을 충실히 따르고 특별한 공연을 위한 준비 없이, 연습실내의 진행과 환경을 그대로 가져 온 듯 하다.
하지만 이 춤을 목도 할 때 여기에 없는 다른 것이 함께 목격이 된다면 두통은 시작된다. 고 김영희의 메소드 '무트'(공연의 핸드아웃에 메소드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는 김영희가 이화여대 취임 이후 대학의 교수라는 타이틀을 달고 만든것이다. 따라서 이화여대 한국무용과에 입학했다면 학업의 과정안에서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춤이었다. 학교라는 집단의 특성으로 이 메소드는 매년 끊이지 않는 신입생으로부터 추어져 왔고 그 두꺼운 시간 만큼 메소드는 몸적 발전을 이룩했다. 더욱이 이 학교는 명실상부한 이화여대 무용과 이다.(우리나라에서 무용과가 제일 처음 생긴 학교란 말이다!) 모두가 이 학교를 가슴에 품고 고등학교 때부터 본교를 졸업한 선생님들의 혹독한 훈련 아래에 이 메소드를 체화시킨다. 그런 금수저 메소드에 갑작스런 김영희 교수님의 작고로 인해 변곡점을 맞는다.
여전히 무트댄스는 이러한 사건 이후에도 건재하는 듯 보였다. 그 해의 이화여자대학교 내에서의 추모공연 이외에도 매년 무트댄스 정기공연이라는 이벤트를 기존과 같이 추진해 왔고 이 과정안에서 기존과 같이 젊은 안무자를 양성하고 유투브 활동 등으로 '무용수 화장법' '무용수 연습복'등의 흥미 컨텐츠를 제작하며 제법 요란하게 활동을 이어나가는 것 처럼 보였지만
이런와중에 이 과정에서 무트댄스에 속하지 못하는 무용수들이 생겨난다.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빗질(?)은 필연적으로 머리카락을 빠지게 하는법. 개인의 사정은 모두 다르겠지만 변곡점 이후에 몇몇 무용수들은 기존의 그룹에서 나온 듯 하였고 그렇게 대학의 권위를 입지 않은, 무트라는 메소드의 이름을 넌지시 피하는, 그렇지만 길게는 몇십년 체화된 춤을 출곳을 찾아서 '콜렉티브 매듭' 이라는 생경한 무리가 만들어 졌다.
다시 공연이야기로 돌아 와서 앞서 밝혔듯 이 공연은 연습실 진행을 그대로 무대로 가져온다. 이것이 얼마나 대담한 시도이냐하면, '무용연습'과 '공연리허설'은 엄연히 다른것이다. 다르다는 개념말고도 실제로 다른 일을 하기 때문이다. '무용연습'은 무용을 연습하는 시간으로 선생님에게 동작을 수정받거나 보완하는 시간이다. '공연리허설'은 공연을 위한 동작과 상태, 의상과 무대를 의식하며 그것들을 한 몸에서 소화하도록 시간을 갖는 것이다. 따라서 동작이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는일과 집중의 방향성 등 세밀한 것들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하지만 '선생님의 부재'로 인해 무용연습과 공연리허설이 모호해진 상황에서 이참에 다른 두가지를 꿰어보자 라고 하는 생각은 상황에 비추어 보건데, 아주 당연하면서 대담한 시도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관객 모두를 선생님으로 만들까?' '동료로 만들까?' '퍼포머에게 감정이 투여될까?' '거리감을 만들어 낼까?' 라는 질문이 생긴다. 그 질문에는 특별히 메소드가 대답을 한 격인데, 그 어느때보다도 동작이 뿜는 심상에 주목하고 특정한 톤이나 정서로 귀결되지 않는 형식이었기에 쉽게 말해, 연습실 특유의 집중 외에 덧입혀진 것은 빠르게 들락날락 했던 그 동작 자체 이기에 '나'라는 관객이 때로는 매섭게, 때로는 응원하며, 때로는 동작을 구경하며, 때로는 친구로서 키득거리며 공연을 보아 온 듯 한다.
한국무용은 다양한 동작의 성질을 갖는다. 밀고, 감추고, 솟구치고, 휘감고, 진격하는 듯한 느낌의 동작은 그 배경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타악기(장구)의 질감과 닮아 있다. 음악 안에서 있는소리와 없는소리를 맞춘다는 것은 한국무용안에서 어떠한 서사와 등장인물을 입지 않고, 동작의 운동성 그리고 그 운동에 대한 심상에만 집중 할 수있는 여건을 부추긴다. 또한,
몸을 가지고 있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 두가지 있다. 바로 호흡과 중력. 우리는 숨을 참고 살아갈 수 없으며 중력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잘추는 춤은 개인의 정의가 모두 다르겠지만, 어쩔 수 없는 것과 어떻게 관계하느냐의 몫이다. 특히 한국무용은 '중력'과의 관계에서 '호흡'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동작은 땅을 밀어내고 당기는 것의 변형이다. 신무용으로 방향을 틀어 꽤 풍요로운 근대화를 맞이한 한국무용 안에서 김영희의 메소드는 이런 기본적인 것들, 그리고 추는이에게는 기분좋은 것들에 다시금 형광펜을 그었다고 느껴진다.
이런 어쩔수 없는 것과 관계하는 우리춤, 한국 춤이 대학과 제도를 만나서 어쩔수 있는 틀 안으로 들어가 강하게 좌우될 때, 우리는 시간이 만들어 준 춤이 인간이 만든 틀 안에서 어떻게 관계하는 지를 되물어야 할 때이다. 이러한 성찰을 하지 않는 대학과 교수, 돈과 힘은 정말이지 이제는 후배들의 원성을 들을 차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