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 - 런던 The Euston Flyer 펍
맥주 여행 첫날 일정은 아주 간단하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영국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에 도착한다. 런던 중심부로 이동해 숙소 체크인하고 펍에서 간단하게 맥주 한 잔 마시고 휴식을 취하는 일정이다. 특별한 거 없이 심플한 일정이지만 8박 9일 중에 가장 힘든 날이 될 수 있기에 비행편을 기다리면서 약간 걱정 아닌 걱정을 했다. 우선 직항 비행기 기준 비행시간만 12시간인 장거리 비행이라 런던에 도착하는 순간 녹초가 된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최대한 휴식을 잘 취하는 게 중요하다. 일상에서는 12시간이 짧은 시간일 수도 있으나 비행기에서 12시간은 매우 긴 시간이다. 매우 좁은 이코노미 좌석에서 12시간은 매우 힘들고 비행기에서 시간이 정말로 느리게 간다. 하지만 이번 여행 때는 오히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너무 놀랐다. 영국 영화 두 편(패딩턴 2와 다키스트아워)을 보고 이번 여행을 함께 할 어메이징한 맥주 책 ('두 바퀴로 그리는 맥주 일기', 최승하 저자)을 좀 읽고 미리 선정해 놓은 펍 리스트들을 보면서 어디 갈까 고민하다 잠이 들었더니 영국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다.
햇빛이 비행기 안으로 들어오는 걸 보니 운이 좋게도 날씨가 매우 좋은 날 런던에 도착한 거 같다. 비행기에서 내려 입국심사 줄을 섰다. 운이 좋다면 가끔 줄이 길지 않아서 30분 만에 입국심사를 끝내고 나올 수 도 있다. 하지만 입국심사 줄이 길면 보통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줄을 서서 대기해야 한다. 입국심사 줄을 보니 대충 두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할거 같다는 느낌이 왔다. 12시간 비행 후 내려서 2시간 대기. 2시간 기다리면서 몸은 점점 녹초가 된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입국심사를 끝내고 23kg 무거운 짐을 찾아 런던 중심부로 이동한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런던 중심부 (1-2 존) 쪽으로 이동할 때 여러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있다. 오랜만에 런던 튜브(영국에서 지하철을 튜브 또는 언더그라운드라고 부른다.)를 타고 이동하기로 한다. 튜브는 런던 중심부로 이동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방법이지만 가장 오래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약 한 시간 정도 걸린다). 오랜만에 오이스터 카드(런던 대중교통카드)를 찍고 비좁고 낡은 튜브를 타니 뭔가 영국에 온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아직 뭔가 확실히 영국에 왔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영국 지하철은 와이파이가 안 되고 핸드폰도 안 터져서 핸드폰을 할 수가 없다. 역시 이럴 때를 대비해 가지고 온 맥주 책을 다시 꺼내 읽는다. 지하철에서 읽는 맥주 책은 너무 재미있다. 자칫 잘못하면 매우 지루한 한 시간을 맥주 책을 읽으면서 보내니 어느새 런던 킹스 크로스 역(King's Cross Station)에 도착했다.
숙소 체크인 후 짐을 좀 풀고 킹스 크로스 역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영국 풀러스 양조장(Fuller's Brewery) 소유의 펍인 The Euston Flyer펍에 갔다. 약 5개월 동안 마시지 못했던 매우 영국적인 맥주 케스크 에일(Cask Ale)! 그것도 가장 좋아하는 맥주 중 하나인 풀러스 ESB(Fuller's ESB) 케스크 에일! 풀러스 ESB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오랜만에 느끼는 매우 영국적인 맥주의 맛을 입안에서 느낄 수 있었다. 영국에 왔다는 게 실감 나는 첫 순간이었다. 기나긴 입국심사 줄도 런던의 비좁고 낡은 튜브를 탔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맥주 한 모금이 주는 매우 영국적인 느낌이었다. 이 순간을 위해 한국에서 멀리 12시간 걸려 영국으로 날아온 보람이 있다고 느낄 정도로 너무 좋았다. 그렇게 ESB 한 잔 마시면서 영국에 무사히 도착한 것을 자축하며 긴 비행의 피로를 풀었다.
풀러스 ESB(Fuller's Extra Speical Bitter)는 엑스트라 스페셜 비터(Extra Special Bitter) 스타일의 맥주로, 캐스크 맥주 도수는 5.5% ABV이며 IBU는 35이다. 약간 붉은빛이 있는 엠버 색깔, 맑은 외관, 아주 아주 얇은 하얀 거품이 특징인 맥주이다. 고소한 견과류, 꿀, 스콘, 건대추, 비스킷, 카라멜 풍미와 몰트에서 느껴지는 단맛과 허브와 풀의 쓴맛이 잘 어우러지는 밸런스가 좋은 맥주였다. 어느 특징 하나가 두드러지기보다는 모든 특징이 잘 살아있고 모든 특징이 조화롭게 잘 어우러지는 맥주였다. 확실히 탄산감과 바디감은 매우 낮았고 허브와 풀같은 쓴맛이 끝에 더 느껴졌다. 마시기 쉬운 맥주이고 여러 잔 마시고 싶은 맥주였다. 한국에서는 케스크에 담긴 ESB는 마실 수 없지만 대형마트에서 병맥주를 구매할 수 있어서 한국에서도 충분히 풀러스 ESB의 맛을 즐길 수 있다. ESB를 탭핑 해놓은 몇몇 펍들도 있으니 영국적인 맥주를 마시고 싶다면 펍에 가서 마셔보는 것도 좋을 거 같다. 개인적으로는 어린이대공원역 쪽에 위치한 알고 탭 하우스(AL-GO Tap House)에서 ESB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기본 안주로 나오는 건대추와 ESB 페어링 해서 마시면 ESB 맥주를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의 첫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주로 유명한 관광지를 기억하지 그 나라에 있다는 느낌을 받은 첫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첫 순간을 기억하는 것처럼 지난 여행을 더욱더 생생하게 기억하는 방법은 없는 거 같다. 필자의 경우 런던 펍에서 풀러스 ESB 맥주 한 모금 마셨을 때 영국에 왔다는 첫 느낌을 받았다. 풀러스 ESB 한 잔 마시면서 행복했던 지난 여행의 첫 순간을 기억해 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