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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ign May 04. 2020

나이 마흔, 다시 이방인

EBS 나도 작가다 1차 공모전

"이야...썬, 너 5개국어 하는 여자 되는 거야?"

"아...진짜 나 학생하기 싫은데. 그냥 직딩이 좋은데... 다시 학생이야. 써글…"

친구와의 편한 카톡. 그러나 내 상황은 심히 불편...


나는 4개국어 하는 여자다. 

영어, 중국어가 내 의지였다면, 이태리어와 앞으로 추가될 독일어는 생존을 위해 배웠고 배우는 언어다.

내 나이 마흔. 

이제 외국에서 산 날이 더 길은 나의 외국어 수준에 대해 자평한다면...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인 성격 상 동시통역 수준까지 끌어올린 언어는 한 개도 없고, 

외국인과 농담 따먹고,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며 배운 전투형 레벨? 그래도 현지 회사 취직해 밥 값 벌어온 거 생각하니 지난 세월이 참 용하다. 


누군가가, 물론 난 유명인도 아니어서 그럴 일이 있겠느냐마는, 내게 언어 공부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한치의 망설임 없이 "No" 다.

나는 천성이 게으르고 머리 쓰고 기억하는 건 딱 질색이다. 그나마도 있던 부지런함은 애가 태어난 후 조금이라도 더더더 편해야 한다는 주의로 변했다. 신기하게도 나의 바램과 달리 나의 환경은 나를 더더더더 공부하게 만들었다. 

나보다 바쁜 남편을 대신해 각종 공과금과 중요 서류, 소아과 의사와 학교 선생님 면담 등등... 나의 삶은 그냥 웃음 한번 쓰윽 짓고 넘어갈 수준을 넘어 "잘 살펴보고 기억해야 할 것”투성이로 가득 차 버렸다. 그리고 몇달 전 남편은 내가 상상도 못한 메가톤 급 폭격을 가했다. 그는 나이 마흔 일곱에 새로운 나라, 새로운 직장으로의 이직을 "신중히" 나와 함께 상의하여 결정했다. 그의 도전 정신은 박수 받아 마땅하나, 평생 "땡 보직"으로 있을 줄 알았던 나의 직딩 생활은 눈물을 머금고 그만둬야 했고, 한국만큼이나 정들어버린 제 2고향을 떠나 다시 이방인이 되야 했다. 


2004년 대학 졸업이후, 지금까지 나는 쭈욱 직딩이었다. 중간중간 타이틀이 여러 번 바뀌긴 했지만 나는 항상 직딩이었다. 나는 학생보다 직딩이 좋았다. 얼마가 되었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나만의 개인적인 트라우마도 있지만 그냥 직딩… 돈 버는 내가 좋았다.

그래 까짓 것. 다시 리셋이지. 내 전공이다. 한국에서 북경, 북경에서 밀라노, 밀라노에서 프랑크푸르트. 한번씩 나라가 옮겨질 때 마다 나의 적응 스킬은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변수가 있다. 이전 이동엔 없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내 새끼와 마흔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그리고 코로나. 


2020년 3월 1일. 나는 롬바르디아 주가 봉쇄되기 대략 열흘 전 마치 예견한 것 마냥 프랑크푸르트로 이사 왔다. 

내 친구 말에 의하면 엑소더스라는데, 그건 좀 기분 나쁜 표현이다. 왜냐면 난 밀라노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거기 있으니 그냥 "아다리가 잘 맞은 정도"라고 우리의 이주일정을 평하고 싶다. 

언어를 하루라도 빨리 배워야 한다. 마음이 급하다. 아이는 어쩌지? 로컬 공립 유치원은 8월부터 오란다. 

오호... 여긴 한국 보육원도 있다 한다. 교민파워가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가정주부이다 보니 배우는 돈도 아깝다. 젤 싼 VHS 라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교육원을 찾아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뭔가 술술 풀린다. 다시 학생 된다고 우울해하지 말고 부지런히 언어 배워 하루라도 빨리 직딩으로 복귀하자... 하고 희망적인 계산을 하고 있는데 등골이 오싹했다. 코로나가 내 등 뒤에서 음흉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 모든 곳이 닫혔다. 차라리 이렇게 올 스탑되었으니 직딩이 아니어도 덜 억울한 거 같긴 한데 왠지 싫다. 이젠 학생도 될 수 없는, 면접도 보기 힘든 상황에 놓인 실업자. 그냥 전업 주부니까.


석봉이는 어둠 가운데서도 반듯한 글씨를 쓰고 그 애미는 균일한 간격으로 기계가 썬 마냥 떡을 썰었다 한다. 나는 수없이 불가능한 환경을 이겨낸 불굴의 인간들에 대해 진심 존경을 마다하지 않지만 가끔은 그런 인간들이 짜증나기도 하고, 같은 사람같이 않고… 종자가 다른 그 '무엇'에 가까운... 물론 bts는 제외다. 각설하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코로나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혼자 DW라는 독일어 무료 어플로 공부를 시작했다. 살림하고 아이보는 단조로운 삶에서 한글자라도 더 보기 위해 나름 노력했다. 나풀거리는 상체에 비해 하체는 축구 선순데, 근 2년간 마라톤까지 출전하며 살 뺀 남편을 보고, 몇일 전부터 나도 뛰기 시작했다. 그냥 뛰면 재미없으니 캉구라는 점프 슈즈를 신고 매일 아침 7시에 나간다. 운동 후 돌아오는 길, 유튜브에서 10초가량 될 법한 독일 광고가 흘러나온다. 무심결 듣는데...써글... 다 들린다. 아멘 할렐루야 감사합니다. 희망이 보입니다. 이제 나이 극복하고 직장만 찾으면 되겠군요. 

남편이 동네 수퍼에서 사람 뽑는다 한다. 그에겐 우스개소리처럼 들렸을 진 모르겠지만 거기라도 지원해야겠다고 했다. 독일어 팍팍 늘지 않을까? 하긴 모르긴 몰라도 그들이 먼저 나를 면접에서 제하겠지.


사실 언어라는 도구 하나 더 늘어난다고 내 인생이 엄청나게 달라질 진 모르겠다. 그러나 모든 시작에 이유가 필요한가...그냥 나는 다시 평범하게 직장생활하고 싶고, 이방인처럼 살고 있는 이 땅이 나의 제3고향이 되길 소망할 뿐이다. 


나이 마흔, 다시 이방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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