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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소대나무 Jul 22. 2019

상상력의 왕국 디즈니가 만든 거대한 고정관념의 향연

영화 라이온 킹을 보고...


상상력의 왕국 디즈니가 만든 거대한 고정관념의 향연    


  선과 악의 팽팽한 데칼코마니

  놀라운 기술 진보 이면에 창의력은 몇 십 년째 제자리걸음 中

  극단적 외모지상주의에 영유아 그릇된 관념 생길 수도···.    

    

  무파사와 심바는 정말 진정한 용기를 깨친 디즈니 세계관의 구세주일까? 그리고 비열한 낯빛으로 권력을 구걸하는 스카와 하이에나 일당은 드넓은 초원에서 축출되어 마땅한 惡이기만 했을까? 무파사와 스카, 혈육의 닮은 듯 정반대인 데칼코마니는 영화 라이온 킹이 상영되는 2시간 동안 긴장의 선을 팽팽하게 당긴다. 유소년들에게 권선징악의 진리를 깨치고 청장년층에겐 추억을 곱씹을 수 있게 해주었다는 이 영화는 개봉 3일 만에 1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전체 연령 시청가능에 이미 애니메이션, 뮤지컬, 책 등 다양한 형태로 재탄생하며 작품성과 예술성을 이미 인정받은 작품이기에 작금의 흥행돌풍은 어느 정도 예견된 돌풍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 흥행실적 너머로 입맛이 떨떠름한 건 내가 꼰대가 되었기 때문일까?    



  ‘하쿠나 마타타’

  근심, 걱정을 잊고 현실을 즐긴다는 뜻을 가진 영화 속 주문이다. 사실 디즈니가 지어낸 ‘사실은 없는’ 이 문장은 멀게는 싸이월드 홈피 제목에서, 가까이는 카카오톡 상태메시지에서 간간이 차용되는, 몇십년 동안 전 세계인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문구다. 이 문구는 맑은 물과 풍부한 먹거리가 보장된 초원의 야생 환경에서 특히 강조되며 영화의 주제의식을 형성하고 있다.

  아버지와 권좌를 동시에 잃은 어린 심바는 ‘하쿠나 마타타’를 모토로 유랑하는 괴짜 듀오 품바, 티몬을 만나며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며 성장한다. 왕족으로서의 막중한 중압감과 권좌를 탐하는 자의 암수로부터 벗어난 심바는 자유분방한 야생생활을 즐기지만 마음 한 편에는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있었다.

  언제나 각성은 옛 연인, 혹은 동료들이 일으키는 것. 심바는 과거는 잊은 채 집시들과 함께하는 새로운 삶에 완벽하게 녹아든 것처럼 보였지만 닐라와 영매 원숭이를 만나며 자신의 정체성을 각성하게 된다. 소중한 것을 지키고 현재의 행복한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부당한 권력에 적극적으로 항거하고 때론 희생을 감수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했다. 또 과거에 대한 미련은 과감하게 잊고 미래에 대한 꿈을 그려낼 수 있는 낙천성도 필요했다.

  한밤 중 영매 원숭이를 따라나선 연못에서 물가에 내비친 자신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그것을 발견해낼 수 있었던 것은 DNA가 위대했기 때문일까? 왕실의 적통을 잇는 심바가 선조의 대의와 진정한 용기를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했기 때문일까? 각성에 성공한 심바는 아버지의 원수이자 부정하게 권좌에 오른 삼촌 스카를 밤샘 혈투 끝에 축출해낸다. ‘빛이 드는 땅’에는 다시금 초록이 자라고 갖가지 짐승들이 모이며 영화는 엔딩을 맺는다.  

  영화는 2시간동안 지루할 틈 없이 빠른 전개를 이어간다. 최신 CG로 이루어진 영상은 정교하고도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다양한 장르의 뮤지컬 음악은 보는 이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몰입감을 더했다.  ’94년도 애니메이션으로 개봉했던 원작을 최신 기술을 동원해 실사화하며 기술적 성취를 일궈냈다는 찬사를 받은 영화. 그런데 주제도, 영화적 장치도 왜 25년 전 수준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일까?



  善을 대변하는 무파사와 심바는 기골이 장대하며 갈기에 윤이 난다. 표정은 또렷하며 어투는 단호하다. 반면 惡을 연기한 스카는 앙상하게 뼈가 드러난 뱃가죽에 몸은 비대칭형이다. 한쪽 눈가는 찢어져 비열한 표정을 짓는 것처럼만 보이는데 갈기는 서로 꼬여 볼품이 없다. 외모지상주의의 극치다. 영화를 본 영유아들은 외모에 따른 고정관념이 자연스레 생겨날 터이다. 권력투쟁에서 동생을 몰아내는데 성공한 무파사는 동생을 어둡고 습한 동굴에 쫓아내는가 하면 영양보충조차 제대로 시켜주지 않았다.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강조한 메시지는 ‘생명의 순환’이다. 한 때 자신의 정적이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혈육마저 어둡고 메마른 곳을 내몰아낸 무파사가 과연 ‘초원 생태질서의 유지’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할 자격이 있을까?

  얼핏보면 무파사와 스카는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둘은 한 배에서 태어나 왕좌를 차지하고, 가장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는 가하면 절벽에서 떨어져 죽는 등 똑같은 운명을 보인다. 흡사 데칼코마니 인생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다. 어쩌면 이 운명공동체에서 혈육에게 버림받은 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주변 동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스카가 또 다른 피해자는 아니었을까?

  하이에나는 참으로 불쌍한 존재다. 어느 나라 고대 속담에 ‘용서받지 못할 짐승은 다음 생에 하이에나로 태어난다.’는 말이 있기도 하다는데 이 영화에서조차 하이에나는 비열함의 상징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심각한 뻐드렁니에 비열한 눈빛, 드문드문 난 정수리의 털은 도저히 하이에나를 정의의 역할로 볼 수 없게 하는, 초원 생태에 없는 게 최선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생명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썩은 고기를 먹어 에너지원을 다시 대지로 환류 시키는 하이에나야말로 어쩌면 초원을 질서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배역은 아닐는지 의문이 든다.


  내년이면 불혹인 사내에게 라이온 킹은 시쳇말로 2시간을 ‘순삭’한 재미난 영화였다. 그래서 더욱 노파심이 생겨난 지도 모른다. 이 재미난 영화는 앞으로도 극장에서는 물론 케이블과 VOD를 통해 수없이 아이들에게 반복 상영될 것이다. 시청하는 유소년들의 고정관념까지 걱정하는 한 ‘꼰대’ 아저씨의 감상이 쓸데없이 불편해보일 수는 있으나 상상력의 왕국이라는 디즈니에서 25년 전의 관점을 변화 없이 그대로 고수한다는 점은 사뭇 실망스럽기만 하다.

  영화 속에 펼쳐진 ‘빛이 드는 땅’은 생명의 균형이 바로 잡힌 아름다운 곳이었다. 맑은 물이 흐르고 뜨거운 태양이 들며 사자와 코끼리, 기린 등 갖가지 동물들이 공생하는 공간이었다. 그 풍족한 땅에 소외받은 스카와 하이에나 무리도 초대를 받아 유기적인 공동체를 이루었다면 시청하는 아이들에게 권선징악보다 ‘상생’이라는 더 훌륭한 가치를 알려줄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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