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형 당뇨 28년, 말하지 못한 시간을 썼습니다.

병이 삶을 설명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by 당당약사

오늘 아침에도 나는 피를 봤다.

손가락 끝을 찌르고, 혈당계에 피를 묻히고, 5초 뒤에 숫자를 확인한다. 혈당은 105.

당뇨인에게는 나쁘지 않은 숫자다.

곧이어 나는 기저 인슐린 주사기 펜에 바늘을 끼우고 삼두근에 꽂는다.

이 생존 루틴을 거쳐야만 나는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이 순서가 흔들린 날이 28년 동안 단 하루도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 일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수하고 양치질하듯이 그냥 아침의 일부가 됐다.

그게 적응인지, 단념인지, 아니면 그냥 사는 것인지, 오랫동안 구분하려 하지 않았다.

나는 아홉 살에 혈당이라는 단어와 친해져야만 했다.

1형 당뇨를 진단받았기 때문이다.

현재 내 몸속에서는 인슐린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췌장은 단식 투쟁이라도 하듯이 인슐린 생산을 완전히 멈춰버렸다.

그래서 나는 아홉 살에 스스로 주사 맞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렇게 28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그 사이 인슐린 펜이 바뀌고, 혈당 측정 방식이 바뀌고, 내가 사는 도시도 바뀌었다.

바뀌지 않은 건 매일 아침의 생존 루틴이다. 피 한 방울, 숫자 하나, 주삿바늘.

언제부터인가 이 시간이 단순한 루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맺히는 피를 보면서, 이걸 언어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하거나 호소하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이런 시간이 있다는 걸 기록하고 싶었다.

글을 쓰면서 알게 됐다. 내가 긴 시간 동안 말하지 않은 게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아프다는 말을 삼킨 날들, 괜찮다고 했지만 하나도 괜찮지 않았던 순간들,

누군가에게 설명하다가 중간에 그냥 포기해 버린 대화.


이 책은 그것들을 꺼낸 것이다.

투병기를 쓰려던 게 아니었다.

이겨냈다고 말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내가 1형 당뇨인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다음 반응은 거의 정해져 있다.

힘들었겠다, 대단하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같은 응원과 격려의 말.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병이 내 삶을 설명하게 두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삶이 병을 품고 있는 이야기.

병이 중심이 아니라 삶이 중심인 이야기, 그게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오래 말하지 못한 시간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어딘가에서 멈추는 문장이 있을 것이다.

말하지 못했다는 게 꼭 숨겼다는 뜻은 아니다.

설명하기 어려웠거나, 설명하고 나서 달라지는 게 없을 것 같은 이유로 그냥 안으로 두게 되는 시간이 있다.

나도 그랬다.

28년 중 꽤 많은 시간이 그랬다.

이 책이 그 시간을 해결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비슷한 시간을 보낸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그 시간을 언어로 옮겨두었다는 것.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써 내려갔다.

읽는 동안 잠깐이라도 혼자가 아닌 느낌이 든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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