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책 분석을 바탕으로
자살, 약물 과다복용, 그리고 알코올성 간질환 세 가지가 절망사에 속하는데, 이런 죽음은 모두 자해에 의한 죽음이라고 볼 수 있다. 총을 쏘면 순식간에, 약물에 중독되면 총보다 느리고 덜 확실하게, 그리고 술을 마시면 그보다도 더 느리게 숨을 거두게 된다.
- 케이스와 디튼,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중에서
의학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100년간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미국인의 기대 수명은 2015년부터 3년 연속 감소했다. 이는 스페인 독감이 창궐한 1918년 이후 세계 2차 대전을 제외하고는 한 세기 만에 있는 초유의 일이었다. 이에 의문을 보인 프린스턴의 경제학자인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튼은 미국인의 기대수명을 보다 심층적으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이 감소세가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들의 자살, 알코올성 간질환, 그리고 약물 과복용으로 인한 죽음의 증가 때문인 것을 발견했다. 이들은 세 가지 죽음을 통칭하여 '절망의 죽음'이라 명명하고 2020년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라는 책을 낸다.
케이스와 디튼이 말하는 절망의 죽음의 원인:
1) ‘괜찮은 임금의 블루 칼라 노동 직종’의 소멸: 40년 전과 비교하여 인구 당 임금은 85퍼센트 증가한 반면, 대학 학위가 없는 미국 백인 노동자들의 임금에 의한 구매력은 13퍼센트 감소했다. 사실 이는 미국 자본주의의 핵심적인 문제이기도 한데, 새로 창출하는 가치의 대부분을 자본이 가져가고, 노동의 몫은 정체되어 있는 것. 또한 임원진과 노동자의 임금 격차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데 2018년 기준 미국 350대 기업 CEO의 평균 소득은 1,720만 달러로 노동자의 평균 소득보다 278배 높았다. 1965년에는 이 차이가 20:1이었다.
2) 노동의 외주화: 상대적 임금 하락과 더불어, 미국 사회의 수많은 블루칼라 노동직들(예, 운송, 보안, 음식을 제공하는 서비스들)은 이제 더 이상 한 가지 회사에 소속된 형태(예, 거대 호텔 체인)가 아니라 작은 회사들로 아웃소싱이 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원인은 아래에). 이게 단순히 안정적인, 보다 큰 회사의 이점들을 누리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집단에의 소속감과 승진 기회의 상실로 이어지며 궁극적으로는 일의 의미 자체가 약해진다는 것. 가령, 작은 아웃소싱 회사에서 보는 미래는 같은 직종의 일이라 하더라도, 힐튼 호텔에서 작은 사무실 혹은 전용 공간을 받아서 일하던 과거와 달리 앞날이 보이지 않음. 이와 같은 상황에서 수많은 블루칼라 노동자들이 아예 노동 시장을 떠나는 경향을 보임.
3) 하지만 케이스와 디튼은 단순 임금 구매력 하락, 노동 환경의 악화가 ‘절망의 죽음’의 직접적이 원인이 아니라, 이로 인한 혼인율의 감소, 공동체의 붕괴, 일과 삶의 의미 상실을 문제로 지적: 1,2로 인해 직장의 의미와 경제적 웰빙을 상실한 대학 학위를 가지지 않은 백인 미국인의 혼인율은 갈수록 감소하고 있는데(1980년대까지는 학위를 가진 사람과 차이가 없었음), 여기에는 가족의 붕괴가 필수적으로 동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 가령, 혼인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커플이 헤어지게 되면, 아이와 부모(많은 경우 아버지)는 사실상 남남이 되고, 연락이 끊기게 된다. 이는 결국 사회의 안정성을 떨어뜨리며, 공동체의 붕괴, 더 나아가 중노년의 사회적 고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4) 종교 활동의 쇠퇴: 3과 유사하게 종교 활동의 쇠퇴는 공동체 결속력의 감소로 이어지며, 이는 사회적 연결을 감소시킨다. 케이스는 한 인터뷰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이런 말을 한다. “단순 종교 활동 비율이 줄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비도시 지역에서는 복음주의 (Evangelicalism)가 득세를 하게 되었다. 복음주의의 경우, 신도들 간의 공동체보다는 신도와 절대자의 연결 자체를 강조하게 되어 종교 자체도 공동체의 활성화에 큰 도움이 안 되는 상황에 와있다.”
사실, 복음주의의 득세야 미국만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종교 활동의 감소라는 측면을 감안하면, 1-4는 모든 산업화된 사회에서 나타나는 경향이 있는데, 왜 미국만 이와 같은 절망의 죽음이 문제인 걸까? 이에 대한 케이스와 디튼의 분석:
1) 오피오이드: ‘절망의 죽음’에 있어 앞서 설명한 오피오이드 사태를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케이스와 디튼은 이미 오피오이드 문제가 시작되기 전부터 절망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오피오이드가 상황을 악화시킨 것은 맞지만, 이는 절망이 기저에서 불타고 있는 사회에 장작을 던진 것일 뿐, 문제는 기저의 절망감이라 주장한다.
2) 천문학적인 의료비용: 국방 비용에 천조 원을 사용한다고 하여 미국을 우리는 ‘천조국’이라 부르지만, 사실 의료에 있어서 미국은 ‘오천조국’이다. 미국의 의료비용은 연간 오천조억에 달하며 전체 GDP의 20% 가까이 차지한다. 미국의 의료 보험 비용은 악명이 높은데, 실제로 기업에서 한 가족의 의료보험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평균적으로 약 2만 불이 든다고 한다. 따라서, 20만 불 이상을 버는 노동자의 경우 회사에서 이를 커버해 줄 가치가 있지만, 연봉이 3-4만 불 정도인 노동자의 경우에는 수지가 맞지 않게 되므로, 이 직종들을 아웃 소싱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해 케이스와 디튼은 “미국 정부가 다른 부유한 국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건강보험에 의무적으로 가입하게 하고 보험료를 통제하는 힘을 갖기를 꺼린다면, 비극은 불가피하다”라고 말한다.
‘절망의 죽음’을 바라보는 자살을 연구하는 중독 정신과 의사로서의 시각:
사실 이 세 가지를 '절망의 죽음'으로 명명한 것은, 지극히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세 가지 죽음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한 것이고, 이를 뒷받침할 이론적 근거는 충분치는 않다. 어떤 학자들은 1999년부터 2022년에 이르기까지 자살률은 40% 정도 증가한 반면 (물론 이도 엄청난 수치이다), 약물 과복용 죽음은 6배 증가한 사실에 근거하여, '절망의 죽음'은 그저 '마약 문제'일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임상가로서, 특히 중독 정신과 의사로서 나는 이 이론에 꽤나 공감하는 편이다. 우선, 절망감과 긴밀히 연결된 무망감(희망이 없는 상태, hopelessness)은 자살과 굉장히 긴밀히 연관되어 있음이 수많은 연구를 통해 이미 증명되었다. 실제로 자살 위험성을 판단할 때 위험 요인 중 하나로 빠지지 않고 무망감이 들어간다.
절망감과 약물 과복용은 조금 관계가 덜 명확해 보이지만, 실제로 임상 현장에서 생존한 약물 과복용 환자들을 만나면, “약물을 과복용할 때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라고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런데, 뭐 죽어도 그만이지’ 이렇게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최근에는 약물 과복용을 하는 사람들이, ‘죽어도 그만', 즉 수동적인 죽음에 대한 생각이 있는 분들이 많다는 이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증의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 질환 사망의 경우에 그 연관성은 더 적겠지만, 알코올로 간이 손상되어서 사망할 정도라면, 절망감이 기저에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케이스와 디튼은 왜 제목에 ‘자본주의의 미래’를 붙인 걸까?
이에 대해 책에서 아주 명쾌한 답변을 얻지 못해, 나는 케이스와 디튼의 인터뷰를 여러 편 보았는데, 그들이(특히 영국에서 온 디튼 경이) 늘 ‘저는 자본주의를 믿지만(I believe in capitalism)’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매카시즘의 악령에 아직도 시달리는 미국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자기 방어체계일지도 모른다. 케이스와 디튼의 강연에서 늘 나오는 질문이 있다. “미국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애플도 나오고, 페이스북도 나오는 것 아니냐”는 질문. 분명 맞는 말이고, 미국의 굉장히 큰 장점이 극단적인 자본주의고, 나 또한 거기서 녹을 먹는 사람으로서 이에 대해 근본적인 비판을 할 자격은 없다. 다만, 자본주의라는 것이 승자독식, 적자생존, 이런 말들과 동의어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미국의 절망의 죽음이 한국에 주는 교훈:
우리는 미국의 상황을 분석하면서 사회적 격변기에 자살 확률이 더 높아진다고 주장했던 사회학의 창시자 에밀 뒤르켐이 쓴 글로부터 많은 지혜를 얻었다. 사회적 격변은 미국의 절망사, 한국의 자살 모두의 근본적인 원인일지 모른다…(중략).. 한국은 전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변화와 경제 성장을 이뤄낸 국가지만, 그런 변화의 이면에서 사람들은 사회적 안식처(social moorings)로부터 단절되고 있을 수 있다. 뒤르켐은 쇠퇴뿐 아니라 급격한 고도성장도 위험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 한국판 서문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이 미국처럼 파멸적인 수준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근거로, 일단 한국은 아편계 마약류(헤로인, 펜타닐)가 널리 퍼지지 않은 사회이고, 미국과 달리 총기가 없는 사회이기 때문이다(미국 자살 수단 1위가 총기이다). 또한 한국의 의료 접근성은 미국과는 달리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며, 전 국민 건강보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반대로, ‘만약에 한국 사회에 총기나 아편계 마약류가 던져지면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의문을 늘 품는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원인들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의 자살률은 여전히 미국의 두 배 가까운 수치를 보이기 때문이다.
흔히 정신 건강문제가 현대인의 질병이라고 생각하기에, 우리는 막연히 자살률은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OECD국가의 평균 자살률은 1990년에 비해 30% 가까이 감소하였고, 대부분의 국가에서 감소하거나 유지되는 추세이다. 거기에 두 가지 예외인 국가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지난 20년간 40퍼센트 가까운 증가를 보인 미국이고, 나머지 한 곳은 OECD자살률 1위를 근 20년간 유지하고 있는 한국이다(물론 한국은 자살률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비해 조금 낮아지긴 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앞서 케이스와 디튼의 ‘절망의 죽음’의 원인으로 꼽은 많은 문제들(양극화, 양질의 일자리 감소, 공동체의 붕괴, 혼인율의 감소, 종교 활동의 쇠퇴)은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다. 혼인율이 떨어지고, 공동체가 붕괴되며, 일과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청년과 청년 자살이 갈수록 늘어나는 현재 상황도 우려스럽다. 케이스와 디튼의 이론이 맞다면, 절망감이 기저에 깔린 우리 사회에서, 결국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무너진 공동체를 다시 재건하고, 잃어버린 사회적 결속력을 높일 것인가가 결정할 것이다.
언젠가 한국사회에 미국의 오피오이드 사태와 절망의 죽음에 대해 설명하고, 이 현상들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는 싶었는데, 제가 좋아하는 배우의 죽음이 그 계기가 될 줄은 몰랐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