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크리:<범죄학에서의 정신분석 기능에 관한 이론적 입문>를 읽고
대한민국 사회는 전통적 유교관을 바탕으로 개인의 행동에 강한 도덕적 판단을 적용한다. 때로는 법과 윤리가 동일시되어 범법자는 단순 법을 어긴 사람이 아니라, 사회 공통의 윤리를 저버린 인간으로 낙인찍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도 이 때문이다. 흔히 ’ 빨간 줄 그인다‘는 말은 단순히 범죄가 발각되었을 때 따라올 사법적 제재만이 두렵다는 뜻이 아니다. 사법원리와는 별개로 범법자의 정상적 사회 통합, 혹은 복귀가 심대한 지장을 겪을 예정이며 고용시장과 사회로부터 배척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특정 부류의 범죄, 특히 강간, 살인 등의 경우는 본디 가해지던 윤리적 압박이 더 거세게 몰아친다.
SNS, 언론과 영상매체 등이 힘을 실어 이런 윤리적 비난은 더욱 가중화된다. 강력범죄의 발생건수가 전반적으로 줄어드는 추세일 때조차 관련 기사 보도율은 증가하였다. 예컨대 작년 7월 신림역 칼부림 사건과 8월 서현역 칼부림 사건 이후로 10월까지 강력범죄에 대한 보도율은 평소에 비해 4배 이상 치솟았다. ’ 16년 강남역 묻지 마 살인 사건 때도 비슷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매번 강력범죄가 주목을 받기 시작할 때마다 공포가 재생산되는데, 특이한 점은 그런 류의 사건이 ‘왜’ 발생했는지에 대한 기사는 보기 드물다는 사실이다. 몇몇 시사 채널에서 강력범죄자의 유년시절부터 주변 평판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생을 조사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진정 그런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경위는 귀담아들으려는 사람이 별로 없다. 언론과 대중의 상호작용으로써 비난의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사회 전체를 동요시키고 범죄행위를 규탄하고 나면, 대중은 다시 만족하고 침묵한다. 마치 윤리적 족쇄가 실증적 힘을 지니기라도 한 것처럼, 희생제의를 치르고 난 부족처럼 말이다.
범법자의 침묵, 대중의 눈먼 질타, 희생제의, 이러한 키워드들로 읽어본 대한민국 사회의 범죄 이해는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 있겠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법적 처벌을 넘어 범법자의 명예를 훼손하고, 공동체 내에서 그를 비난하고 배제하는 방식으로 확장된다. 때로는 범법자의 행위로 인해 가족과 공동체 전체가 수치심과 책임을 공유하게 된다.(앞서 언급한 시사채널류의 범죄자 유년시절 보도도 심리적 이해라기보다는 이런 식의 접근을 선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난 뒤에 숨은 의도란 단순히 응징에 있지 않고, 잘못을 범한 사람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고, 공동체로 재통합시키는 데 있다. 비록 추잡한 영혼으로서 최소한의 언론 윤리의식조차 없이 비난을 재생산하는데만 일조하는 언론인들이 있지만, 진정 어린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에서 우리는 회복적, 속죄적 정의의 가능성을 직감한다.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 상충되는 요구를 처벌과 배제의 이중성으로 요약해 읽어볼 수 있다. 즉, 범법자의 생명이나 평판, 심지어 가족의 명예까지도 사법적·윤리적 제재에 포함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까지 충족시키지 못할 경우, 사회에서 영구히 배제시키는 방법으로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사회적 배제란, 현대사회에서 사회구성원의 추방이란 국제사회의 비난으로 이어지므로, 사실상 인격체의 윤리적 말살이라는 추상적 형태로 실현된다. 윤리적 말살이란 해당 주체의 어떤 언표도 사회적으로 용납되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의 변호는 변명에 불과하며, 언행은 위선적인 기만으로 취급당하고, 억눌린 감정의 폭발은 악어의 눈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라깡은 정신분석의 대의로서 ‘주체의 말을 잘 듣기 위한 실천’이라 설정한 바 있다. 이미 잘 짜인 윤리적 틀로써 주체를 단죄하는 일에 정신분석이 동조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단순히 잘 듣기 위한 실천일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윤리적 비난의 실체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물리적인 것을 다루는 학문들에서의 이론이 인식의 운동 자체인 내적 일관성이라는 요구를 실제로 벗어날 수 없다면, 인간과학은 대상의 현실 자체에서의 행위 속에서 체현되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의 의미 문제를 회피할 수 없거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진리라는 관점에서 제시되지 않도록 할 수가 없다.” - 에크리 번역본. p.149.(원본 p.125.)
문제를 조금 단순화하기 위해 사회 일반에 작용하는 윤리적 비난과 사법적 제재를 같은 선상에 두고 사유하는 위험을 감수하겠다. 어찌 됐든 두 종류의 제재는 범죄 일반에 거의 동시에 수반되는 듯한데, 그것은 유교적 가치관의 엄격한 기준 적용을 위해서는 실증법과 동등한 수준의 내적 일관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끄 알랭 밀레가 경험(expérience)에 관해 말한 바, 현실적 경험이란 항상 지식을 빠져나가는 구멍을 가리키는 기표다. 다시 말해, 인간과학이 윤리적 수준에서든 사법적 수준에서든, 대상의 현실 자체를 온전히 포획할 수 없는 지점이 있기 마련인데, 이때 과학으로서의 실증법 혹은 윤리는 딜레마에 봉착한다. 그러한 특수한 사례가 구성된 적이 없던 척 무시하고 스스로를 진리의 위치에 올려놓거나, 지식의 구멍으로서 발생한 경험의 의미를 인정하고 다시 새로운 지식을 구성하는 문제다. 즉, 윤리적 비난의 과학적 유효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운동이 요구되어 해체되고 재성립되기를 반복해야 하는데, 이는 윤리적 타당성 자체를 의심하게끔 만든다. 따라서 우리가 논의한 바, 윤리는 스스로를 비합리적 신의 자리에 올라선다.
여기서는 어떤 경험이 윤리, 혹은 사법적 제재의 지위까지도 위협할까? 그것은 범죄학의 오랜 딜레마로 범죄자를 비인간화하는 위협에 가려진 주체의 증언이다. 사법체제와 사회의 윤리 일반이 주체와 어떻게 충돌하는지는 각각 개별 사례로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하지만 우리는 몇 가지 가설을 통해 그들의 심리적 반향을 증언하기 위한 단서를 몇 가지 마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장 단순한 변호로서 법 자체가 범죄를 구성한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실제로,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의 발명 이후 일반화된 인식이기도 한데, 법이 금지하는 행위에 대한 인식과 욕망을 동시에 자극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프로디언 정신분석의 오이디푸스 서사와 이에 해당하는 유형의 범죄가 이에 해당한다. 아버지의 명령과 권위를 위반하고 어머니를 독차지하려 했다는 오이디푸스적 일화는 금지가 욕망을 추동하는, 그런 종류의 충동에 대한 비유적 묘사다. 실증적 예시로는 미국의 금주법(Volstead Act)과 알코올 범죄 증가, (유엔마약범죄사무소가 발표한 바) 엄격한 마약정책과 마약 시장 성장의 상관관계 등을 살펴볼 수 있다. 보다 와닿는 근거로 대한민국의 불법 성(sex) 시장은 어떠한가. 이는 서구사회와 극명하게 비교되어 전통적 유교관에 근거한 실증적 사법 제재까지 이어지는 사례로, 단순히 포르노 시청조차 금지되어 음성화되었다. 물론 사법제재를 제거한다고 해도 윤리적 금지가 존속하는 한 음성화된 시장이란 언제나 존재하겠지만, 최근 성범죄에 대한 일련의 사법적 제재와 동시에 VPN이용도가 급증했다는 통계는 상당히 흥미롭다.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법과 무관하게, 또 본인의 의식적 차원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위법적 욕망이 형성되는 시나리오다. 이는 주체가 윤리적 제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60년대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에드먼드 캠퍼는 언론사와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저와 같은 연쇄살인마가)이 사회에 35명보다는 훨씬 많을 겁니다. 이 사회에서는 그렇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에요. 음지에 있는 걸 선호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살인 충동의 근원으로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불화를 지목했는데, 그가 캘리포니아 대학 산타크루즈 캠퍼스의 여자 대학생들을 살인한 이유도 자신의 어머니와 연관 지어 설명한다.
‘제 어머니가 대학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일했기 때문에 저도 여대생들을 죽였습니다. 제 어머니는 남성에 대해 매우 강력하고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입장을 취했습니다. 제 어머니는 또한 매우 화나있고, 배고프고, 슬픈 여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로부터 고통을 겪고 있었어요. 아버지와의 실패한 결혼생활에서도요. 저는 그 실패를 계속 상기시키는 존재였습니다. (제가 살해한) 피해자들은 제 엄마를 재현했다기보다는 어머니가 좋아했던 것, 탐했던 것, 어머니에게 중요했던 것을 의미했고, 저는 그걸 파괴한 겁니다.’
캠퍼는 라깡이 주장한 대로 초자아가 범죄를 유발한 전형적 케이스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엄격한 통제와 언어적 학대를 경험하며, 그를 집 안에 격리시키며 여성에 대한 접촉을 금지했다. 이를 통해 초자아는 캠퍼의 성적 욕망과 자아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조성했다. 캠퍼의 살인 행위는 어머니에 대한 무의식적 적대감을 해소하는 동시에, 초자아의 강압적 명령을 충족하려는 시도로 해석 가능하다. 어머니를 살해한 후 캠퍼가 그녀의 신체 일부를 훼손하고 그와 대화하려 한 행동은, 초자아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상징적 행위이며, 이는 초자아가 단순히 금지를 부과하는 것을 넘어 금지된 욕망을 유발하고 극단적 위반을 통해 이를 해소하려는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이 구도, 즉 <초자아의 금지 내면화 – 무의식적 욕망의 강화 – 죄책감의 발현 – 금지된 행위가 쾌락의 실현>이라는 오이디푸스적 전개는 학문으로서 범죄학뿐만 아니라 현재 사회 일반이 온전히 무지한 분야다. 무의식이라는 말이 한국사회에서도 만연히 쓰이는 반면, 범죄행위가 쾌락의 실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설명은 금기시된다.(물론 한국사회에서 무의식이라는 개념이 기여한 바는 극히 미미하다) 세계적 트렌드로서 범죄학은 신경생물학과 공조하여 과거 영국에서 예비범죄행위마저 일급 범죄로 규정했던 오판을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 최신 경향성을 논외로 제쳐두더라도, 현재 범죄학의 주요 관심은 ‘어떻게 (예비) 범죄자를 미리 파악할 수 있는가’ 내지는 ‘범죄자의 자백을 어떻게 유도해 낼 것인가’에 그친다.
<범죄학에서의 정신분석 기능에 관한 이론적 입문>이라는 제목으로 에크리에 실린 논문이 50년대 프랑스어권정신분석가협회에서 발표된 지 어연 70년이 지났는데도, 그들의 욕망을 내밀히 들여다보려는 시도는 매우 미미하다. 범죄를 현실적 구도에서만 논의하는 건 더 이상 의미 없다. 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예비범죄자를 판별해 내려는, 미래를 내다보고 싶어 하는 관음증적 욕구와 다르지 않다. 정신분석의 가장 큰 교훈이라면 ‘주체가 하는 모든 말은 합리적’이다. 윤리적 잣대를 들이밀기 이전에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들어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