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에세이
산다는 건 꽤나 비루한 여정이다. 인류의 역사는 영화와 문학을 포함한 여러 예술이라는 수단을 동원해 생의 부조리함을 끝도 없이 다뤄 왔다. 그렇다면, 이런 부조리라는 고(苦)속에 빠진 인간의 삶이란, 중지하지 않고, 결국 그 결탁을 맺지 않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자살과 관련된 상담을 많이 해보지 않은 상담자들과 대화하다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주된 관심사가 '어떻게 하면 자살을 멈출지'에 맞춰지는 것이다. 자살을 해야만 하는 그의 삶에 관하여 묻기보다는, 사람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기반한 갈급함이 목구멍에서 뛰쳐나와 죽지 말라는 강요를 야기하고 만다.
이런 맥락에서 일반적으로 많이들 나오는 반응은, 주변 사람을 생각해서 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어떤 점에서 상당히 고압적인데, 네가 죽음이라는 죄를 지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니 죽지 말라는 것이다. 젊은 청년들의 경우 아이러니하게 그런 죄책감 때문에 군대에 와서 자살한다. 예전과 다르게 최근 군에서 발생하는 자살 중 부조리로 인한 것은 많지 않다. 많은 경우, 군대는 그저 자살의 장소일 뿐이다. 가족과 친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고, 자신이 죽게 되면 가족이 아니라 타인이 자신을 치워준다는 것. 이런 이점이 자살 예정자들을 군에 입대하게 만든다.
인간의 유전자에는 자살을 죄로 인식하도록 하는 천부적 특질이 내포되어 있을까. 아니면 인간의 신경회로는 자살에 대한 단서를 인식했을 때 즉자적으로 반응하도록 설계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자살이 죄라는 종교적, 문화적 신념이 우리 무의식에 뿌리 깊게 박혀있는 것일까. 복잡계 그 자체인 이 세계에서 정답을 알 순 없다.어쨌든, 대개의 경우, 자살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면 사람들은 불쾌해하고 입을 막으려 한다. 불쾌하다는 건 불안하다는 것이고, 불안하다는 말은 그 뒤에 나타날 무언가가 두렵다는 말이다. 자살이라는 말의 무엇이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 걸까. 자살이 이토록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면, 자살은 그 자체로 정말로 중요한 문제인 것 아닐까. 만약 자살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문제라면, 아주 구체적이고 상세히 말해져야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하고자 하는 말은, 죽음에 대한 죄의식에 잠시 괄호를 치고, 자살에 대해, 더 나아가 인간의 삶이 정말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아니 나의 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먼저 시지프 신화에서 까뮈가 다뤘던 자살에 대한 언급을 참조하는 것이 좋겠다. 까뮈는 세계가 부조리하여 자살한다면, 그것은 세계에 의해 살해되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저항하는 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자유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함정 하나가 숨어있다. 자유라는 가치를 인간이 선험적으로 사랑할 것이라는, 당연히 자신의 삶의 이유로 삼을 것이라는 전제이다. 저항하는 삶도 물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는 자유라는 가치를 존중하고 그 가치를 내 삶의 거죽으로 삼을 수 있을 때에야 의미가 있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자유를 원하지 않은 인간은 까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어도 자살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자유라는 가치를 위해 세계에 저항할 이유가 그에게는 없으므로.
나는 그것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려 한다. 인간이 어떤 가치를 원할 것이라는 전제를 제거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의 삶을 이끌 만한 가치가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여기서 질문을 다시 시작해 보자.
첫째, 확실하다고 판명될 만큼, 세계의 가치들을 충분히 탐색했는가.
둘째, 충분히 탐색했다면, 그것이 나에게 맞지 않다는 판단이 나의 무의식적 상태(정신 상태, 타인의 압박, 세계의 부조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롯이 나의 의식적 결정인가.
전자를 먼저 살펴보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미덕이라고 부르는 가치들을 우리는 이미 대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실제 삶의 양상을 보면 그 미덕 한두 개 만으로 살아가지는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 미덕들이 뒤섞이고 엉켜서 인간의 삶을 이끈다. 실질적으로 삶을 끌고가는 마차는 말끔하지 않고 생각보다 성기고 끈적하다.
사랑과 도덕이라는 가치를 생각해 보자. 어떤 이는 도덕성을 자신의 인격적 가치로 삼고 살아간다. 하지만, 가족이 큰 죄를 저질렀다면? 그런 상황에서 어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이 무너질 수도 있겠지만, 어떤 이는 아주 능란하게도 사랑과 도덕성을 교잡하여 내로남불식 도덕성, 사랑하는 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도덕성이라는 가치를 발명하여 정체성을 교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가치는 기존에 존재하던 가치인가? 온전히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즉, 우리가 일상적으로 아는 미덕 말고도, 이 미덕들을 조합하여 나에게 가장 타당하다고 여겨질 만한 가치들을 창조할 가능성은 거의 무한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내가 죽기 전까지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의미로운 가치들을 다 파악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더불어 내가 좀 더 다양한 가치들을 융섭해 보려면, 위에 제시했던 것처럼 각종 가치를 적용해 볼 만한 상황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 모순적이게도, 이 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내려면 생을 충분히 경험해봐야 하는 것이다.
이제 후자를 살펴보자. 여러 가치들이 나에게 맞지 않다는 판단이 현재 나의 정신 상태, 타인의 압박, 세계의 부조리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것인가. 우선 나의 정신 상태에 대한 명확한 알아차림이 수반되어야 한다. 나의 기질과 내가 어렸을 적 경험한 어떤 것으로 인해 무의식적 패턴이 형성되었고, 그 패턴이 일종의 신경증으로 나를 자살로 몰아넣는 건 아닐지를 충분히 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어느 정도 분석과 상담으로 검토하는 건 가능할지라도 단기간에 온전히 검토하는 건 불가능하다. 현재 고통감을 느끼는 신경증은 수면 위로 잘 드러나니 작업이 가능하지만, 기억도 못하고 떠올릴 단서도 없는 무의식을 파악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정신 상태가 나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을지 온당히 판단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그리고 그 시간을 소요한다 할지라도 온전한 정신적 지도를 그릴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이 정도까지 오면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의 생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살만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인간에게 주어진 수명이 너무 짧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평생 동안 자살이 타당한 것인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고민하더라도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죽게 될 가능성이 높다. 반면, 평생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운좋게도 나에게 맞는 가치들을 발견하고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낼 가능성은 꽤 있다. 탐색의 시간과 발견의 가능성은 비례하므로. 다시 말해, 평생을 고민하는 동안 나를 살게 만들 의미있는 가치를 발견할 확률은 꽤나 점진적으로 올라가고, 살만한 가치가 없어서 자살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릴 확률은 아주 미미하게 상승한다. 둘 중 어떤 결론이 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분명한 건, 일단 생을 지속해야 이 고민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 결론에 닿을 가능성이 보존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자살에 관해 고민한다면, 죽음에 관해 고민한다면, 나는 이를 적극적으로 환영하려고 한다. 구체적으로 자살에 대해서 고민해 보자. 그런데, 죽을 때까지 고민해도 결론을 내기 어려울 수 있다. 그래도 한번 곰곰이 살펴보자. 평생에 거쳐 이 삶이라고 하는 것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기꺼이 사유하며 죽음을 지연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