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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Sep 25. 2024

욕망하고, 헤아리고

영화 에세이 <우리선희>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

어떤 사람은 자신을 찾기 위해,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을 잃기 위해 이웃에게 간다. 바보는 말한다. "사람들과 나누는 교제는 성격을 망가뜨린다. 아무런 성격도 갖고 있지 않을 때 특히 그렇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성격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 타인과 접촉하는 일의 위험을 경고한다. 타인과의 잦은 만남은 오히려 나를 잃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타자를 소환한다는 것.


홍상수 감독의 영화 <우리선희>에서 주인공 선희는 유학을 위한 추천서를 받고자 모교에 방문하는데, 이날 자신과 알고 지내던 남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그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묻는다. 선희는 왜 자신이 궁금해졌을까? 아마 추천서 때문일 것이다. 유학을 가려면 자신을 잘 아는 교수에게 추천서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교수는 답장을 지연하고 선희는 초조해진다. 급기야 답장을 주지 않은 교수를 추궁하러 모교에 찾아온 상황. 알고 보니 교수는 선희가 자신을 만나주지 않자 서운한 마음에 답장을 안 했던 것이다. 상당히 추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교수로부터 시작되어 선희는 두 명의 지인을 더 만나게 되고 선희는 이들에게 자신이 누군지 묻는다. 하지만 여기엔 함정이 하나 있다. 세 남자 모두 선희를 욕망하는 사람들인 것. 그들은 선희를 향한 그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아첨한다. 어떤 평론에서는 자신을 찾는 데 있어서 말의 무용함, 말의 엇갈림 따위를 언급하는 듯하나 문제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이 남자들이 선희가 어떤 사람인지 헤아리는 데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선희가 자신을 선택하길 바라면서 말의 형식을 빌려 그저 선희에 대한 ‘추천사’를 쏟아낸다. 애초에 선희가 학교를 방문하게 된 동기가 추천서라는 걸 감안하면 이런 교언의 난무는 당연한 수순이라 볼 수도 있겠다.


선희의 자아 찾아 삼만리가 난맥에 빠질 때쯤 의미심장한 장면 하나가 드러난다. 문수와 주연, 선희가 함께 노포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에서 달큰하게 취한 문수가 같은 말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파고, 파고, 파고, 파고 자신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기점으로 문수는 인사불성이 된다. 이 장면은 왜 의미심장한가? 자신을 찾기 위해서는 타자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면으로 침잠해야 한다는 진실을 문수가 누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진실은 문수의 의식 수준에서 폭로되는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 의식을 잃기 직전에 누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무력하다.


그렇다면 선희는 처음부터 자신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 됨으로써 자신에 대한 ‘추천’을 확보하려 한 것일까? 전적으로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다. 추천서를 기점으로 선희에게 자신에 대한 궁금증이 발생한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자가 아닌 그녀를 욕망하는 자들에게 간 이유는, 아마 나 자신을 헤아린다는 미지를 향한 모험이 두려움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선희는 진실과 추천을 적당히 섞은 ‘선희’라는 칵테일을 마시고 싶었던 것. 하지만 선희를 욕망하는 남자들이 셋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서로 ‘추천사’를 경쟁하게 만들고, 그로 말미암아 선희에 관한 진실이 그들의 말에 내포될 가능성을 원천 봉쇄시킨다. 그리하여 이 이야기의 비극은 아마 이런 것 아닐까. 다수에게 욕망되는 인간이란, 그 다수의 욕망 경쟁에 의해 점점 원본이 지워지는 복사본 같은 거라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차라투스트라의 말을 참고해 보자. 

“다수의 욕망은 개인의 성격을 망가뜨린다. 자신이 누군지를 모를 때 특히 그렇다.”


그렇다면 인간은 타인으로부터는 나를 찾을 수 없는 비극적 존재인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또 다른 욕망의 이야기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를 통해 살펴보자.


토메크는 우체국에서 일하는 19살 학생으로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막달레나라는 여성을 좋아하게 된다. 고아원에서 자라 마땅히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고 사랑을 해 본 적도 없는 그가 할 줄 아는 유일한 사랑법은 망원경으로 그녀의 집을 염탐하는 것. 그렇다면 그는 관음증적 욕망을 가진 인물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그녀가 집에 다른 남성을 데리고 와 관계를 맺으려 할 때면 망원경에서 눈을 떼어버리기 때문이다. 하루는 막달레나가 어떤 남자와의 다툼 후 서글프게 울고 있자 토메크는 하숙집 할머니에게 물어본다. 사람은 왜 우는지, 슬픔이란 무엇인지, 그럴 땐 어찌해야 하는지. 그로써도 충분하지 않았는지 그는 가위를 가지고 와 손에 상처를 낸 후 다시 망원경으로 그녀를 들여다본다. 아마도 그의 소망은 정욕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리라.


반면 반대편 건물에 사는 막달레나는 공허한 인물이다. 예술 작품을 만들고 잦은 남자관계를 맺지만 그것으로는 그녀의 공허감을 채울 수 없다. 남자들이 떠날 때면 그녀는 채워진 욕망 이상으로 더 큰 슬픔에 빠져든다. 그런 그녀에게 토메크는 자신의 관찰기를 고해하고 자신을 욕망하는 남성이 한 명 더 추가 됐다는 사실에 그녀는 진저리를 낸다. 하지만 동시에 바보처럼 자신의 스토킹을 고백하는 이 무력한 청년에게 흥미가 생긴 막달레나는 토메크를 시험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집에 남자를 데리고 와 토메크가 관계를 관음하도록 하고, 남자를 내보내 토메크에게 주먹을 날리도록 하며, 토메크를 방에 데리고 와 자신의 몸을 더듬도록 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가 관계를 가질 때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남자가 부를 때는 순순히 나가 무력하게 주먹을 맞으며, 막달레나가 자신의 몸을 더듬도록 했을 때는 그녀의 집에서 도망쳐 나와 고통을 잊으려 손목을 긋는다. 원하는 게 뭐냐는 그녀의 질문에 토메크가 뱉어낸 대답은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 뿐이다.


세 번의 시험을 끝내고 나서야 그녀는 깨닫는다. 이 미숙한 청년은 아직 욕망의 세계로 넘어오지 않았구나. 이 청년의 시선에는 정말 헤아림뿐이구나. 그제서야 그녀는 처음으로 토메크의 이름을 묻고, 그의 집에 방문해 그의 망원경을 들여다본다. 마치 욕망없이 자신을 바라보았던 토메크의 시선을 자신도 경험해 보려는 듯이. 그렇게 망원경에 눈을 댔을 때 건너편 방에는 울고 있는 그녀와 그 어깨 위에 손을 올려 다정히 감싸 안는 토메크의 모습이 보인다. 이 마술적인 환상은 토메크의 시선이면서 동시에 그녀가 소망했던 시선이었을 것이다. 그 장면이 만족스러웠는지 그녀는 안온한 미소와 함께 눈을 감는다. 아마 토메크의 시선을 빌리면서 그녀 또한 자신을 욕망의 대상이 아닌 헤아림의 대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리라.


<우리선희>에서 선희는 남자들로부터 자신을 찾으려 하나, 욕망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선희’라는 인간은 지워지고 종국에는 그들의 추천사로 이루어진 ‘우리’선희만이 남는다. 그리고 선희는 여기에 만족한다. 자신의 본래면목을 바라보는 것이 무섭기도 하고 아직은 남들의 욕망으로 채색된 자신의 모습이 썩 나쁘지 않기 때문에.


반면,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막달레나는 기능하지 못하는 욕망의 불능을 실감한다. 더 이상 타인의 욕망을 받는 것으로는 내적 공허감을 채울 수 없고 이제는 그 이상의 것, 헤아림이 필요하다. 그녀는 자신을 ‘욕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시험에 통과한 토메크의 시선을 통해 자기 자신을 헤아리는 법을 다시 배운다.


그렇다면 선희는 그르고 막달레나는 옳은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외피가 아닌 내피를 들여다보는 일은 으레 두려움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욕망의 세계로 도망치는 일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타자의 욕망으로 인간의 공허를 채워내는 것도 결국 불가능하다. 그러니 인간의 행로가 다시 내면을 향하는 것 또한 불가피한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은 욕망이 작동할 때까지 끝없이 욕망하다, 그것이 무력해졌을 때 헤아림의 시선으로 회귀하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는 차라투스트라의 말에 사족 하나를 더 붙여보려 한다.

“사람들과 나누는 교제는 분명 성격을 망가뜨린다. 아무런 성격을 갖고 있지 않을 때 특히 그렇다. 하지만 이는 불가피하다. 자신을 충분히 잃어 본 사람만이 다시 자신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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