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부산영화평론가협회 영화비평 공모 당선작

알랭 기로디 감독론: 방랑하는 영혼이 고이는 욕망의 골짜기

by 영화평론가 장승호

호숫가에서 길을 잃다


게이들의 크루징으로 활기를 띠던 호숫가가 잠잠해지는 해질녘. 프랑크(피에르 들라동샹)의 연인 미셸(크리스토프 파우)에 의해 앙리(파트리크 다쉼사오)가 죽고,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제롬 샤파트)도 잇따라 살해당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프랑크는 황급히 풀숲으로 숨어들고 미셸의 목소리가 프랑크를 뒤쫓는다. “프랑크, 나는 너를 해치지 않아. … 우리 이 밤을 함께하자.” 그러나 어둠 속에 침잠한 프랑크는 답하지 않는다. 침묵하며 이를 지켜볼 뿐. 어느새 미셸의 목소리도 발걸음도 들리지 않지만, 카메라는 미셸을 쫓지 않고 여전히 멈춰선 채 프랑크만을 비춘다. 자연광을 극도로 신뢰하는 기로디의 프레임은 밤의 검정으로 가득 차고, 이제 그 안에 있는 무언가가 프랑크인지 아닌지도 정확히 알 수 없다. 막막한 어둠 속, 풀 끝의 미세한 움직임으로 프랑크의 존재를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잠깐의 정적과 고독의 시간. 일순간 프랑크가 풀숲 밖으로 걸어 나와 떨리는 음성으로 조용히 외친다. “미셸.” 그 파동이 미처 다 퍼져나가기도 전에 화면은 암전되고 영화는 끝난다. 알랭 기로디의 <호수의 이방인>(2013)의 마지막 장면.


기로디의 영화 중 가장 잘 알려진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을 이해하는 흔한 도식은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바타유적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가령, 프랑크는 분리된 인간이라는 개인의 상태로부터 존재의 가장 원초적 양태인 타나토스적 죽음을 향하고 있으며 그 동력은 에로스라는 해석 말이다. 이런 도식적 해석도 물론 기로디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일리 있는 접근 중 하나겠지만, 동시에 이런 관습적 접근이 이 이미지가 내포하고 있는 어떤 가능성을 배제한다는 인상 또한 지울 수 없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이 장면은 죽음을 향하는 에로티시즘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이다. 풀숲에 숨어들었던 프랑크가 스스로 걸어 나와 미셸을 찾는 대목을 다시 보자. 이 장면에서 깜깜한 화면 안에 희미하게 잡히는 프랑크는 나신의 실루엣을 걸친 채,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미셸을 부른다. 아마도 풀숲 속에서 겪었던 완전한 고립의 시간이 그를 겁나게 만들었으리라. 이를 선뜻 죽음을 넘어서까지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의 이미지라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떨리는 목소리로 미셸을 찾는 프랑크의 모습은 되려 홀로임을 견뎌내지 못하는 인간의 초상에 가깝다. 말하자면, 살해당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으로 인해 타자를 향해 방랑하는 취약한 단독자로서의 인간.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서 기로디의 이미지는 욕망 혹은 죽음의 이미지 이전에, 고독과 방랑의 이미지다.


사실, 기로디의 영화는 어떤 점에서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방랑에 관한 것이었다. 기로디의 첫 장편 <용감한 자에게 안식은 없다>(2003)는 촬영이 진행될 당시만 해도 그 제목이 ‘라발레르’였고, <노바디즈 히어로>(2022)와 <미세리코르디아>(2024)의 토대가 되는 그의 소설 제목 역시 『라발레르』(2021)다. 남부 프랑스 오크어로 ‘방랑자’ 혹은 ‘게으름뱅이’를 뜻하는 이 단어는 기로디의 영화 세계가 방랑에서 출발하여 여전히 그 방랑 안에 머물러 있음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상한 점은 최근 들어 그의 세계에서 물리적 방랑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의 초기 영화들에서 공장 밖(<오래된 꿈>(2001)), 들판 혹은 고원(<가난한 자에게 햇살을>(2001) <때가 되었다>(2005)), 초현실적 공상(<용감한 자에게 안식은 없다>) 등의 열린 공간이 방랑의 장소로 배정되었던 반면, 최근작에서는 그 배경이 점점 닫힌 공간으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노바디즈 히어로>에서 메데릭(장샤를 클리셰) 일행은 불량배들을 피하다 아파트에 고립되고,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제레미(펠릭스 키실)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은 후 공동체에 속박되는 처지에 놓인다. 기로디의 인물들은 보여지듯이 방랑에서 정주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이 수렴을 이끄는 동인은 무엇일까. 본 글에서는 기로디의 필모그래피 전반에 배어있는 방랑의 흔적을 추적하며 그 근원이 무엇이고 기로디가 이 ‘라발레르’들을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지 밝혀 보려 한다.



오래된 꿈이 움직일 때


기로디의 카메라가 피사체로 선택하는 인물들은 대개 고독하다. 아니, 모두 고독하다. 이처럼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하나 같이 호소하는 외로움을 보다 보면, 어느 순간 관객의 입장에서도 고독이 인간에게 자연히 주어진 실존적 조건임을 실감하게 된다. 마치 인간의 역량으로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존재의 흐름으로 말이다. 물론 기로디는 인물들을 그런 외로움에 방치하지만은 않는다. 그는 <오래된 꿈>에서 폐쇄가 일주일 남은 공장의 노동자들에게 자크(피에르 루이칼릭스트)라는 에로스를 선물한다. 자크는 남은 기계들을 모두 해체하기 위해 공장에 방문한 기술자다. 그런데 그의 존재는 기계뿐만 아니라 공장의 노동자 루이(장 세가니)와 주임 도낭(장마리 콩벨)의 성애까지 해체(혹은 해방)해 버린다. 이미 가정이 있는 이성애자의 삶을 살고 있던 이들이 자크로 말미암아 동성애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들의 욕망은 자크가 도낭에게, 루이가 자크에게 뜬금없이 무언의 스킨십을 시도하는 장면을 통해 전경화되는데, 이는 말 그대로 갑작스럽다. 왜냐하면 영화는 이 장면 이전에 이들의 동성애적 욕망을 추리할 만한 어떤 내레이션이나 단서를 관객에게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부조리극의 인상을 띠기도 하는 이 장면들은 기로디 세계의 전형을 보여주는 순간이다.


일반적인 영화가 성적 접촉 이전에 어떤 단서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멜로드라마적 정동을 연출한다면, 기로디의 영화는 정반대다. 일단 성적인 접촉과 교류가 대뜸 발생하고, 그 행위가 정체성을 구성하는 단서가 된다. 각 인물이 무엇을 욕망할지는 관객은 물론 그 욕망의 그릇인 주체 자신도 사전에 온전히 알 수 없다. 인물들은 직접 타자와 교감한 후에야 그 욕망을 지속할 수 있을지 알게 될 뿐이다. 다시 말해 그의 세계에서 욕망의 형상이란 확정되어 주어지는 것이 아닌 범성애적 잠재성의 형태로 전제되는 것이다. 결국, 기로디의 영화에서 정체성은 이미지를 매개물 삼아 드러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된 이미지라는 독립 변수들이 축적되어 산출하는 종속 변수에 가깝다.


대상의 수나 정체성을 가리지 않고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는 무한한 잠재태로서의 욕망은 영화의 원제 ‘움직이는 이 오래된 꿈(Ce vieux rêve qui bouge)’처럼 기로디의 인물들 내면에 잠복하던 ‘오래된 꿈’을 일깨운다. 그리고 이 욕망은 이들이 고독이라는 실존적 조건으로부터 이탈하도록 추동한다. 바야흐르 방랑의 시작이다. 이렇듯 본격적인 장편 작업 이전의 중편들(<오래된 꿈> <가난한 자에게 햇살을>)에서 욕망은 쇠락의 자리에 주어지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아울러 이 퇴락은 개인이 무언가에 부착했던 리비도를 회수하여 모험적 방랑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작은 죽음이자 계기로 기능했다. 루이와 도낭은 그들이 삶을 바쳤던 공장을 잃었지만 앞으로 탐구하고 음미할 욕망을 부여받고(<오래된 꿈>), 나탈리(이자벨 지라르데)는 실직이라는 사건을 연료 삼아 우나예 양 떼를 선망했던 내면의 소망을 끌어올려 모험으로 나아간다(<가난한 자에게 햇살을>).



표류하는 방랑자들


이상한 점은 기로디의 첫 장편 <용감한 자에게 안식은 없다>에서 그 시선이 냉소적으로 선회한다는 것이다. 고독과 욕망, 방랑에 관한 기로디의 사유에 변화가 생긴 것일까. 우선 영화의 마지막 장면, 바닥에 앉아 중얼거리는 바질(토마 쉬르)의 혼잣말을 들어보자.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싶다. 그게 뭔지 찾고 있지만 못 찾을 수도 있다. … 그 외의 것들, 일자리 문제나 일상의 문제들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롱 숏으로 거리를 둔 카메라 탓에 내레이션인지 웅얼거림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이 말들 위로, 엔니오 모리꼬네의 스파게티 웨스턴을 연상케 하는 음악이 활기차게 오버랩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오프닝과 동일한 음악이 창출하는 수미상관에도 불구하고 이 결말은 어딘가 개운치 않다. 왜냐하면 바질이 영화 내내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고 도망만 다녔기 때문이다. 그는 잠들면 죽는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어떤 의심도 없이 ‘불면의 사투’에 착수하고, 그를 찾아온 이고르(토마 블랑샤르)와 쟈니(로랑 소피아티)를 서부극의 무법자처럼 장총으로 살해한다. 그러곤 다시 나타난 쟈니로부터 도망치던 중 그를 갱스터에게 넘겨, 결국 두 번에 걸쳐 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서 바질은 무법자도, 보안관도, 무력으로 자신의 법을 입증하는 총잡이도 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도피하는지 정녕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며, 어떤 점에서는 그다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듯 보인다. 실질적 조언자였던 쟈니를 버린 후 마을 공터에 앉아 주절거리는 바질의 모습은, 초자아 없는 림보에 영원히 갇혀버린 자의 초상처럼 보인다. 이 원환 같은 림보 위에 쏟아지는 웨스턴풍의 음악이 조롱처럼 느껴지는 건 그저 기분 탓일까. 확실한 건, 스크린이 비추는 바질의 이미지는 <오래된 꿈>과 <가난한 자에게 햇살을>에서 기로디가 그려낸, 느릿하게 꿈을 향해 유영하는 에로틱한 방랑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런 냉소적인 태도는 <때가 되었다>에도 반영된다. 영화는 중세풍 판타지 안에 서부극의 도상을 차용한 듯한 인상을 풍겨 관객의 기대를 유발하지만, 이내 그 기대를 가차 없이 배반한다. 오프닝에서 명성 있는 추적자로 소개되어 존 웨인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던 포고 롬플라(에리크 부뇽)는 정작 여로에서 강도를 당해 옷가지와 금전을 모두 빼앗긴다. 그는 우나예 양치기들이 지배층에게 핍박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들을 착취하는 영주의 밑에서 임무를 수행한다. 더불어 포고는 가정이 있는 토바(진 달리크)를 사랑하면서도 관계에 대한 결단은 유보한 채, 목동처럼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무력한 인간이다. 영화의 엔딩 신, 포고에게 질린 토바는 자신을 들판에 두고 가지 말라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가 자네 집이야.”


기로디는 프랑스 남부 시골의 풍경을 서부극의 프론티어처럼 구축하면서도 <리오 브라보>(1959)의 챈스(존 웨인)가 뿜어낸 프로페셔널리즘이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1962)의 스토다드(제임스 스튜어트)가 지켜낸 강직한 신념 따위의 것들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바질과 포고는 현실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연약해서 기로디가 초기 중편들(<오래된 꿈> <가난한 자에게 햇살을>)에서 그려냈던 모험적 방랑은커녕, 마땅히 져야 할 현실의 책임조차 감당하지 못한다. 퇴행에 가까운 이 소극적 도피 속에서, 이들은 내적 고독을 해소하지도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지도 못한 채 표류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기로디는 영화의 끝에 이르면 어떤 희망도 없이 그들을 들판에 던져버린다. 마치 자기 안의 어떤 것을 내다 버리는 것처럼.



수직으로 서는 법


초기 장편들(<용감한 자에게 안식은 없다> <때가 되었다>)에서 기로디의 카메라가 프론티어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주저앉는 인물들을 엔딩 숏에 박제한다면, <도주왕>(2009)과 <스테잉 버티컬>(2016)에서 그는 그 연약한 인물들이 표류를 멈추고 ‘직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는 마치 자신의 방랑자들이 난파된 것을 본 창조주가 그들을 정련(精鍊)하는 과정으로 읽히기도 한다.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의 귀향길 난국마다 그의 성장을 도왔던 아테나처럼 말이다. 그렇게 기로디의 인물들은 단독자로서 ‘수직’으로 서기 위한 훈련에 돌입한다.


이 변곡점에서 직립을 위한 주요 방법론으로 ‘욕망의 지연’이 등장한다. 먼저 <스테잉 버티컬>을 보자. 영화는 ‘지연-차단’의 방식을 통해 자립할 수밖에 없는 곤경으로 인물을 몰아간다. 오프닝 숏에서부터 크루징을 하며 시나리오 작업이라는 현실을 도피하는 레오(다미앵 보나르)의 모습은 <용감한 자에게 안식은 없다>의 바질의 이미지를 연상시키지만, 영화는 그가 부표처럼 표류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레오의 도피 생활 중 그의 아이를 낳은 마리(인디아 아이르)는 그에게 “또 떠날 거”냐고 묻는데, 레오가 그에 관한 답을 얼버무리자 바로 다음 장면에서 그와 아이를 두고 달아난다. 레오가 집요하게 구애하던 요안(바질 메이유라) 역시 그를 거절하며 나중에는 마리와 결탁해 아이마저 빼앗는다. 영화는 레오가 욕망의 도피로 미끄러지려 할 때마다 이미지들을 수문 삼아 이를 맹렬히 차단한다. 그는 아이를 빼앗겨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는 한계까지 몰리고 나서야 장루이(라파엘 티에리)의 농장에서 일을 배우며 자립을 시도한다. 그리고 자신을 책임지고 종종 아이까지 돌보는 ‘직립’의 주체로 섰을 때, 비로소 그의 앞에 신화처럼 나타난 영감(혹은 욕망)의 원천인 늑대(죽음)와 꼿꼿이 선 채로 대면할 수 있게 된다.


반면, <도주왕>의 아르망(뤼도빅 베르티요)은 ‘지연-탈주’의 방식을 통해 대안적 정체성과 삶의 양식을 시도한다. 그는 크루징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돌이키다 “남자라면 여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퀴를리(아프시아 에르지)와 함께 이성애적 도피를 시도한다. 영화는 욕망의 단식을 감행하는 그의 탈주를 조력하듯 형식적으로도 동성애 이미지를 지연시킨다. 아르망은 극 중 수차례 섹스를 하나 그것이 장면화되는 순간은 최음성 버섯 ‘두루뉴’에 의지해 본인의 성애가 아닌 퀴를리와 섹스할 때뿐이다. 정작 아르망과 장자크(브뤼노 발레예)의 동성애 섹스는 장면화되지 않는다. 우리는 침대에 누운 두 남성의 후일담을 통해 이전 상황을 짐작할 따름이다. 그나마 이미지로 포착되는 폴(파스칼 오베르)과의 구강성교 또한 맥락 없이 초현실주의 오브제처럼 들이닥친 경감(프랑수아 클라비에)의 방해를 받아 중단된다. 이렇게 지연된 욕망의 이미지들은 당겨진 진자가 놓이는 순간 다시 원점을 향해 운동하듯, 아르망을 동성애 정체성으로 복귀시킨다. 정체성을 횡단하고 대안적 삶의 양식을 수행해 본 덕분에, 그는 자신의 좌표를 정위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이 시기 욕망의 지연은 개인을 네 발이 아닌 두 발로 직립하게 한다. 이는 인물로 하여금 욕망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과 당당히 대면하도록 만들거나, 내적 반발감을 유발하여 역으로 정체성을 공고화한다. 흥미로운 건 이 지연에 부수적 효과가 하나 더 있다는 점이다. 아르망이 장(장 토스캉)에게 권태에 빠지지 않는 비법을 배우는 대목을 보자. 장은 “너무 많은 정력을 소비해야”하므로 성적 행위는 하되 사정은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그는 “덕분에 몇 시간이나 섹스를 할 수 있”으며 “땀을 흘리지 않으니 다른 걸 하는” 데 에너지를 쓸 수 있다고 한다. 즉, 절정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대신 그 근처를 영구히 맴돌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영속적인 욕망의 방랑을 즐기려면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욕망을 견딜 수 있어야 하며, 자립한 후에도 욕망을 추구하되 달성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황당하지만 동시에 묘한 설득력이 있는 이상한 테제다.



골짜기를 향하여


‘자립’할 수 있게 된 기로디의 인물들은 다시 열린 고원으로 떠나게 될까. 기로디의 최근작을 보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노바디즈 히어로>와 <미세리코르디아>에 이르면 영화의 배경이 지방 도시의 아파트와 작은 산골 마을이라는 닫힌 공간으로 좁혀지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공간의 변화는 이전 영화들에서 이미 예고된 측면이 있다. 온 숲을 이리저리 도망다니던 아르망은 엔딩에서 오두막 내부에 게이 공동체를 구축하고(<도주왕>), 고원과 도시를 전전하던 레오는 결국 농장에 자리를 잡는다(<스테잉 버티컬>). 앞선 영화들이 표주박처럼 떠돌던 인물들이 어떤 골짜기와 같은 공간에 도착하며 막을 내렸다면, 최근작들은 그 도착 지점, 즉 닫힌 골짜기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듯하다. 더불어 주목할 만한 점은 『라발레르』의 주인공 자크의 방랑이 <노바디즈 히어로>와 <미세리코르디아>의 모티프가 되는 공간들을 거쳐 마무리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화 세계가 그려온 방랑도 이제 그 종착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물론 그 끝은 환각성 탕약을 마시고 영혼의 세계에서 초월적 해답을 찾는 『라발레르』의 결말과는 다를 것이다. 판타지를 향해 발산하는 소설과 달리, 기로디는 적어도 영화 안에서는 항상 현실에 발을 붙이려 하기 때문이다.


‘욕망의 지연’이라는 모티프는 <노바디즈 히어로>와 <미세리코르디아>에서도 여전히 연장된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점은 이 ‘지연’이 발생하는 방식이다. 최근작에서 그것은 개인이 의식적 목표에 따라 자신을 절제하는 방식(<도주왕>)으로 작동하지 않고, 마치 근본적인 삶의 조건처럼 인물들에게 덧씌워진다. 말하자면 의식적으로 욕망을 지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적 힘에 의해 욕망의 유예가 강제되는 것이다.


먼저 <노바디즈 히어로>의 메데릭을 살펴보자. 그는 극 중 수차례 섹스를 시도하지만, 단 한 번도 사정하지 못한다. 이사도라(노에미 르보브스키)와의 첫 섹스는 도심의 테러 뉴스로 인해 중단되고, 그녀의 집에서의 밀회는 이웃의 의심 탓에 미수로 그친다. 기어코 교회에서 섹스를 감행하는 순간조차 위치추적을 한 제라르(르노 뤼탱)에게 발각되고 얻어맞기 일쑤다. <미세리코르디아>도 마찬가지다. 제레미는 장피에르(세르주 리샤르)를 욕망하나 그가 세상을 뜰 때까지 고백하지 못하고, 왈테르(다비드 아얄라)에게는 거절당한다. 그런 제레미를 필리프(자크 드블레)가 욕망하지만 역시 제레미는 그를 원치 않는다. 죄를 숨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협약만이 둘을 느슨하게 연결할 뿐이다. 마르틴(카트린 프로)이 제레미를 곁에 두려고 할 때도, 그는 일정 거리 이상을 넘지 않고 미끄러지듯 빠져나간다. 뱅상(장바티스트 뒤랑)은 언뜻 제레미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나(뱅상은 그와 함께 밤을 보내거나 몸을 섞으려 하며 제레미와 왈테르의 관계를 질투한다), 다툼 끝에 제레미에게 살해당한다.


모두의 욕망이 불발에 그치는 이 촌극이 다소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결과는 묘하게도 낙관적이다. 이 욕망의 지연이 어떤 정동적 잉여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갈망하지만 소유하지는 못하는 아이러니한 풍경은 각각의 인물들에게 활력과 생기를 불어넣고, 서로를 향한 이 에로스적 열망은 클레르몽페랑의 아파트와 생 마르셀 마을 내부에 욕망의 공동체를 생육한다. 기로디의 인물들은 이 작고 닫힌 공간 안에서 서로를 향해 성실히 방랑한다. 특히, <미세리코르디아>에서는 이전 작품들과 달리 클로즈업에 기반한 숏-리버스 숏의 연쇄를 통해 그 스릴러적 긴장을 강화하는데, 얼굴과 얼굴의 중첩과 충돌이 만들어 내는 중력은 공동체 내부를 더욱 압축되고 농밀한 미로로 만든다. 기로디의 세계에서 방랑의 장소는 고원과 들판을 건너, 이제 좁은 관계의 미로 안에 안착한 듯하다.


덧붙여서 <미세리코르디아>의 흥미로운 점은 그 공동체가 꽤나 자생적이라는 것이다. <노바디즈 히어로>의 공동체가 불안정한 ‘엇갈림’으로 시작된다면, <미세리코르디아>는 ‘분배’를 통해 그 공동체를 안정화한다. 제레미가 “손은 잡아도 되”냐며 침대 위에서 슬그머니 마르틴에게 접근하는 엔딩 숏을 보자. 얼핏 보면 이 장면은 어떤 욕망의 성취처럼 보이지만 이는 착시다. 제레미는 이미 마르틴 외에 필리프와의 관계도 약속한 상황이다. 게다가 그는 앞으로 왈테르 혹은 어디선가 그를 지켜보고 있을 마을 사람과 추가적인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품고 있다(제레미가 마르틴의 집 앞에서 대화를 엿듣는 장면에서 그를 엿보는 신원 미상의 남성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정체가 드러나지 않는데, 이는 마치 마을 내부에 현현한 욕망의 잠재태처럼 보인다). 모두가 제레미를 욕망할 수 있으나 누구도 그를 독점할 수는 없는 이 불완전성은 역설적으로 욕망의 공동체를 지속 가능하게 만든다. “아직 좀 이른 감이 있”다는 마르틴의 말이 반영하는 긴장과 갈증은 이미 공동체 내부에 지하수처럼 스며 있다. 카메라는 이 잠깐의 휴식을 음미하라는 듯 완연한 어둠 속에서 제레미와 마르틴이 손을 잡은 모습을 암전 전까지 충분히 담아낸다. 그리고 어쩐지 제레미는 이 마을을 영원히 공전할 것만 같다.


나아가 욕망의 지연이 만들어 내는 이 정동적 잉여는 세계가 양산하는 부적 엔트로피를 흡수하고 타자를 향한 돌봄에 투여되기에 이른다. <노바디즈 히어로>에서 메데릭과 이사도라, 셀림(일리에스 카드리)과 샤를렌(미벡 파카) 사이에 형성된 엇갈림의 거미줄은 서로를 더욱 안달 나게 만드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영화 전반부를 지배하던 이방인 셀림을 향한 편집증적 공포는 점차 소화되어 희미해진다. 그들은 어느새 셀림을 불량배들로부터 보호하는 중이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에 남는 건 셀림이 있는 건물을 향해 뒤늦게 달려오는 샤를렌의 설렘 가득한 얼굴뿐이다. <미세리코르디아>에서 제레미의 죄(살인) 역시 그 공동체에 의해 대사(代償)된다. 마르틴은 여전히 제레미를 의심함에도 엔딩 숏에서 그를 침대에 들이고, 신부인 필리프는 자신의 직업적 양심과 협상하여 제레미의 죄를 은폐하는 공범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제레미의 살인은 필리프가 그를 더욱 욕망하게 하는 기폭제나 마찬가지다.


결국, 기로디의 세계에서 공포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며 죄 또한 징벌 혹은 용서의 대상이 아닌 듯하다. 그에게 공포 혹은 죄는 기성적 관습으로 재단할 대상이 아니라, 정동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세계에서 윤리적 행위란 발생한 에너지를 남김없이 생을 위해 소진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살하려는 제레미에게 “이 세상은 멸망해 가”며, “우리에겐 죽음이 필요하”다고 설득하던 필리프의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린다. 세계가 멸망하고 있다는 것은 죽음이 에너지를 낳고 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만연한 죽음 속에서도 그것을 양분 삼아 사랑이라는 버섯을 피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그것의 지연이 생산하는 잉여와 함께 골짜기 안을 영원히 순환할 것이다. 초기에 공장을 떠나 들판과 고원을 떠돌던 기로디의 개인(個人)들은 이제 서로에게 단단히 얽힌 분인(分人)이 되어 관계의 골짜기를 유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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