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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Apr 08. 2024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 및 비평

카메라, 이토록 오만한 생물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이 영화가 보기 싫었다. 영화의 제목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evil does not exist〉라니. 데카르트나 니체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단정적 명제의 오만한 냄새는 관람 욕구를 떨어트리기에 충분한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피어오른 궁금증 하나는, ‘대체 그는 어떤 방식으로 저 말도 안 되는 명제의 진위를 입증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었다. 전작들의 양태를 보았을 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섬세하면서도 기계적인 정교함으로 작품을 직조하곤 했는데 그런 방식으로 저런 명제를 입증하는 것이 가당키나할까. 이런 몇 가지 물음들을 가지고 극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영화는 그 단정적 메시지를 책임지는 데 기어코 실패함으로써 완성된다.


영화는 시작하면서 정면에서 90도 위의 하늘을 오랫동안 한 쇼트로 찍어낸다. 이 쇼트는 수많은 나무들의 가지가 얽히고설켜 자연이라는 우주를 형성하고 그곳에서 각각의 나무들이 흐르는듯한, 그리고 그 거대한 조류에 카메라가 함께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 감상에 한창 빠질 때쯤, 카메라는 전기톱으로 나무들을 조각내는 타쿠미를 비추는데 이런 장면전환은 급작스러울 뿐만 아니라 감상적으로 느끼던 나무들이 시끄럽고 날카로운 톱날에 갈려나간다는 점에서 섬짓하다. 그리고 카메라는 이내 잘리는 나무의 시점인 마냥 타쿠미가 톱을 들고 나무를 자르는 장면을 정면 클로즈업으로 담는데, 이는 마치 살해당하기 전 피해자가 가해자의 얼굴을 직시하는 시점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어떤 착각이 시작될 수 있다. ‘저 사람이 악일 수 있겠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제목의 속성상 영화 읽기의 초점을 ‘누가 악인지 찾는 게임'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이 초반 쇼트는 명확하게 타쿠미를 정조준함으로써 관객에게 함께 악을 찾아내자는 말을 은근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카메라는 반복적으로 자신이 정조준했던 ‘악인 용의자’들의 악마성을 무화시키는데, 이는 선명한 그림을 그려놓고 그것을 다시 흐리게 만들어 초점을 일탈시켜 버리는 리히터의 ‘흐리기’를 연상시킨다.

게오르그 리히터의 '흐리기'. 리히터는 그림을 그린 후에 그림을 다시 흐리게 만들어 버림으로써 재현과 미메시스에 대한 그의 철학을 암시적으로 드러내던 화가이다.

가령, 영화 초반에 제시되는 글램핑장 설명회 시퀀스가 그러하다. 글램핑 기업이 원주민들의 터전에 침입했음에도 오수와 화재 발생이 예상되는 부실한 계획을 들고 와 다툼을 유발할 때, 선악의 구도는 [원주민-글램핑 기업]의 이항 대립으로 전개되는 것만 같아 보인다. 하지만 다음 시퀀스에서는 양심적으로 계획 자체를 백지화하려 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 보려는 이들의 대화를 연달아 제시함으로써 카메라는 용의자에 대한 정조준을 다시 흐리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만약에 표면적인 서사의 흐름에서 찾기 힘들다면 숲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필요가 있다. 숲 안에서는 글램핑장과 원주민들의 관계와는 다르게 명확한 이항 대립이 두 가지 더 관찰되는데, [나무-타쿠미 / 사슴-사냥꾼]의 관계가 그러하다. 타쿠미는 나무를 살해하고 조각내서 자신의 난방을 유지하고, 사냥꾼들은 총기로 사슴을 사냥해서 생계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타쿠미가 악인 것일까. 이런 질문 이전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사냥꾼들이 단 한 번도 프레임 내에 등장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가끔 들려오는 총성으로 그들의 존재를 암시할 뿐 이들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자체가 불확실하다. 더불어 영화 내에서 타쿠미가 벌목된 나무들을 조각내는 장면은 계속 등장하지만, 정작 나무들이 살해(벌목)되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프레임에 주로 등장하는 건 백골화가 진행 중인 사슴의 시체와 이미 죽은 채로 조각나고 있는 나무들이다. 즉, 카메라의 주요 초점은 악행의 과정이 아니라 그것이 벌어진 뒤에 남겨진 희생자들이다. 카메라는 악을 찾겠다면서 계속해서 이미 죽은 것들을 촬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는 와중에 타쿠미는 이번에도 건망증으로 인해 딸 하나의 귀가 시간을 잊어버리고, 하나는 아버지가 데리러 오지 않자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다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다. 심부름센터를 하고, 숲의 모든 나무들과 구성 요소들을 꿰고 있으며, 마을의 촌장이 믿을만하다고 소개하는 타쿠미라는 인간의 저 불능은 뭔가 이상하다. 그는 숲에 관해 알고 있는 것에 비해 막상 이 숲의 어떤 것도 통제하질 못하고 있다. 사람들 간의 관계도, 딸 하나의 하원도, 사슴의 생사도. 그나마 타쿠미가 행사하던 나무의 생사여탈권조차 카메라는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이미 사망한 나무를 조각낼 뿐이다. 그렇게 무력하게 숲을 헤매던 타카츠키와 타쿠미는 하나가 총에 빗맞은 사슴과 대면하고 있는 걸 발견하는데, 위험을 감지하고 하나를 구하려고 하는 타카츠키를 타쿠미가 제압하고 이내 목을 졸라 그를 죽여버린다. 그다음 쇼트에서는 쓰러진 하나가 프레임에 들어오고 타쿠미는 하나를 안고 숲을 향해 뛰어간다. 타쿠미는 마을을 향해 달리고 카메라는 첫 쇼트와 동일하게 나뭇가지들이 교차되는 하늘을 비추는데, 이내 타쿠미의 호흡 소리가 멈추고 카메라도 그 자리에 멈춰 영화의 첫 쇼트와 동일하게 멍하니 나뭇가지들이 엉켜있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마도 하나가 죽었기 때문이리라.


그 점에서 서사 초반에 등장하는 글램핑장은 악 찾기의 맥거핀에 가깝다. 글램핑장의 직원들이 마을에 오지 않았어도 타쿠미는 딸의 하원 시간을 잊어버렸을 것이고, 글램핑과 무관하게 사슴은 총에 맞았을 것이며, 그렇게 하나는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타쿠미를 글램핑장의 관리인으로 세우려는 타카츠키와 마유즈미의 계획은 모순적이며, 타쿠미는 마지막 시퀀스에서 그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불능 천지인 자신에 대한 분노는 자신을 따르려고 했던 타카츠키에게 이어지고, 간단하게 말릴 수 있었음에도 그는 과도하게 목을 졸라버린다. 타카츠키가 그 이후에 죽었느냐 살았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타쿠미가 자신에 대한 분노를 투사한 채로 명백한 살해 의사를 실천했다는 것과 타카츠키와 하나는 희생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희생이 끝나고 타쿠미가 하나를 안고 숲으로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쇼트를 장악하고 있던 안개가 걷히는데, 카메라가 영화 내내 시도했던 ‘흐리기’를 이제 멈출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일종의 신호처럼 읽히기도 한다. 그러면 대체 악은 어디에 있는가. 타쿠미, 타카츠키, 하나 이 세 인물들은 모두 어떤 희생양에 가깝지 명백한 ‘악’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면 이제 남은 대상은 프레임 외부에서 가끔 소리로만 들려오던, 이 모든 사건의 시작점에 있던, ‘총성’ 하나뿐이다.


생명을 살해하는 이 총성은 외화면에서 소리로만 들려오며 내화면에 이미지로 포착되지 않는다. 악의 존재가 암시되지만 볼 수는 없다. 그 악의 존재는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흐르듯 카메라가 비추는 서사 공간에 독처럼 스며든다. 보이지 않는 그 흐름은 계속해서 희생자를 양산한다. 그리고 그 희생에서 우리는 불능하다. 그리고 그 불능에서 할 수 있는 건 자신을 대체할 사람을 살해하는 일 뿐이다.  종국에, 카메라는 악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한 진위 판별에 실패한다. 카메라가 계속 초점을 잡고 있던 대상들은 모두 희생자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카메라에게 입이 있다면 자신의 이 불능을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악은 이 프레임 내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희생자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거꾸로 악이 존재함을 암시한다. 다만, 나는 그것을 촬영하기엔 불능했다’


우리는 종종 영화를 볼 때 프레임 안에서 틀린 그림 찾기를 하는 것처럼 악을 찾으려고 한다. 하지만 때로는 프레임의 내화면, 외화면, 더 나아가 이미지로 표현되는 서사 공간에서조차 악을 찾을 수 없을 때가 있다. 이 모순적 상태는, 악은 찾지 못하고 희생자만 발견되는 아이러니로 귀결된다. 그렇게 마지막 쇼트에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 알 수 있는 사실은, 첫 쇼트에서 나무들이 움직인다고 느꼈던 감상이 착시에 불과했고, 움직였던 것은 타쿠미와 카메라였으며, 타쿠미는 균형을 통제하기에는 불능했고, 카메라 또한 악을 찾아내기에는 불능했다는 것이다. 카메라가 프레임에 담을 수 있었던 건 그 속에서 죽음으로 희생되는 나약한 존재들이었을뿐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최후의 쇼트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며 영화라는 매체의 근원적인 질문으로 다시 돌아간다.


"무엇을 담을 것인가. 그런데, 그것이 담겨질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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