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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May 21. 2024

<비브르 사 비>를 말할 때 소격효과는 제발 그만

현대영화를 거론할 때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개념 중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라는 개념이 있다. 관객이 몰입을 통해 느끼는 환각 상태를 타파하고 거리를 두고 작품을 관조하도록 유도하는 이 방식은 관객들을 주관적 몰입에서 객관적 사유의 영역으로 이동시켰다는 점에서 예술사적 의미가 있으며 영화사에서는 트뤼포의 <400번째 구타>나 고다르의 영화들을 언급할 때 지겨울 정도로 등장하는 단어가 됐다. 그러는 중 한 가지 물음이 떠오른다. 연극의 언어인 '소격효과'는 수많은 영화비평과 교과서에서 언급하듯 정말로 관객을 객관적 사유의 위치로 이동시키는가? 그리고 그 효과는 연극의 그것과 동일하며 온당한가? 그에 대한 답을 고다르의 영화 <비브르 사 비>를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비브르 사 비>에서 소격효과를 드러내는 부분이라면 나나와 남편이 대화를 나누는 카페와 매춘에 관한 설명을 듣는 시퀀스, 쇼트/역쇼트를 빙자해 관객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는 쇼트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급작스럽게 라울에게 살해당하는 엔딩 시퀀스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시퀀스들을 관객이 객관적으로 상황을 관조하도록 하는 ‘소격효과’로 이해하게 된다면 한 가지 문제가 생긴다. 거리를 두고 나나를 분석하는 행위는 나나-세계의 관계를 영화-관객의 관계에서 재상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극 내에서 나나는 환경적 사건들에 의해 꿈이 무너지고 하나의 매춘 기계로 구축(拘縮)되고 마는데, 만약 나나를 매춘 여성 일반으로 대상화하고 사회적 견지에서 영화를 사유한다면 그 또한 그녀를 그저 분석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때 <비브르 사 비>는 감각해야 할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사회를 비판하는 납작한 영화 작품(film) 하나가 되어버린다.     


개인적으로 20세기 정신분석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변화를 고르자면 동정(sympathy)에서 공감(empathy)을 변별하고 구제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타자와 거리를 둔 채 그를 불쌍히 여기고, 남을 연민할 줄 아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던 기만적 자기애로부터 벗어나 타자의 손을 잡고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느껴보려는 행위는 위계적 이항 대립으로 점철된 역사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모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모험의 시작을 위해서는 ‘소격효과’라는 관념어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나 사이의 상호주관적 장으로 뛰어들어 온몸으로 타자를 감각해야 한다. 그때 이 영화라는 낯선 이방인은 자신을 내보이기 시작할 것이며, 이를 위해 고다르는 극 내에서 타자의 상처를 감각할 기표인 말과 이미지를 끊임없이 흩뿌리고 있다.   

  

<비브르 사 비>는 영화의 오프닝 쇼트에서 나나의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보며 시작된다. 롱쇼트로 촬영해도 아름다움을 숨길 수 없는 안나 카리나의 얼굴을 마치 예술 작품을 찍듯 구석구석 클로즈업하는 모습은 앞으로 그녀의 진짜 '얼굴'을 보기 힘들 테니 충분히 봐두라는 신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장면은 카페에서 나나와 남편이 대화를 나누는 쇼트로 전환되는데, 이때 카메라는 시점 쇼트나 쇼트/역쇼트를 활용하는 방식이 아닌 그들의 뒷모습을 투쇼트로 잡는 방식을 택한다. 이 다소 긴 쇼트에서 대화하는 인물들은 얼굴이 배제된 채 말을 하는 반면 관객은 비언어적 표정 단서들을 박탈당한 채 남의 말을 엿듣듯이 온전히 소리라는 기표에만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쇼트 내에서 인물들의 얼굴이 카페의 작은 거울을 통해 흐릿하게 스치는 것처럼 그들의 말은 서로의 마음에 가닿지 못하고 의견 차이만을 확인하고는 미끄러진다. 그리고 그녀는 말을 경멸하게 된다.


이후 나나가 칼 드레이어의 <잔다르크의 열정>을 감상하며 눈물을 흘리는 순간이나 쇼트/역쇼트인 척 빙자하며 관객의 방향을 응시하는 순간에는 소음으로 가득 찼던 영화의 사운드가 일순 자취를 감추고 얼굴과 무성만이 남는 진공의 시간이 도래하는데, 그녀의 영혼이 말이라는 장해에서 벗어나 진실한 무언가에 가 닿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팔코네티의 얼굴이 나나에게 가 닿듯이, 그렇게 나나의 얼굴은 우리에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런 잠깐의 환상은 오래가지 않는다. 그녀는 배우 생활에 실패하고 생활고로 인해 매춘업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나나가 매춘에 관한 설명을 듣는 시퀀스에서 나나가 수행하는 매춘 생활의 이미지들과 매춘의 규칙과 법령을 설명하는 말이 중첩되는데, 이때 이미지들은 주체가 되지 못 하고 말을 형용하는 관형어의 지위로 격하된다. 이는 나나의 신체가 말로 설명되는 매춘 규칙에 종속되어 생기를 잃은 기계 그 자체로 몰락하는 과정을 낯설지만 고통스럽게도 드러낸다. 이런 충돌되는 말과 이미지들은 기표의 칼날이 되어 관객의 심부에 박히기 시작하고 이제 더 이상, 이 ‘낯설게 하기’를 관객을 객관적 위치에 두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는 그 무엇보다도 계속해서 관객을 나나의 삶으로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비브르 사 비>에서의 ‘낯설게 하기’는 오히려 관객의 주관성을 ‘극대화하는 것’에 가깝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고통을 의미하는 ‘얼굴’이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감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타자의 고통은 어느 순간 불현듯 주체의 세계로 침입한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이를 기표가 날아와 불확정성 상태에 있는 주체에게 상처를 내는 것으로 설명하는데 이 상처로 말미암아 주체는 자신을 넘어서 타자의 세계로 초월할 수 있다. <비브르 사 비>의 작동 방식 또한 이와 유사하다. <비브르 사 비>는 직접적으로 나나의 고통을 강조하기보다는, 낯설게 함으로써 오히려 나나의 진정한 얼굴이자 고통을 관객의 몸 안에 현전시켜 관객을 말 그대로 아프게 만든다. 다시 말해, 관객을 객관적 위치가 아니라 주관적 위치, 더 나아가 감각의 세계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소격효과’는 영화 안에서 ‘낯설게 하기’ 그 자체일 뿐이다. 거기에는 응당한 객관성과 주관성은 존재하지 않고 관객에게 침투하는 기표만이 존재한다. 무엇이 벌어질지는 영화라는 사건에서 벌어지는 상처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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