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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승호 May 17. 2024

<괴물>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0.

나라는 인간이 아무리 너를 노려본다 한들

네 속의 문드러짐 털 끝이나 만져볼 수 있겠느냐

네 옷가지나 몇 점 더듬다가

이내 고개나 돌려 버리겠지

다만, 내가 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내가 너를 계속 보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1.

불가해한 타인의 존재.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이런 주제는 포스트모던의 심장을 이미 꿰뚫고 지나간 21세기에 있어서는 너무 낡은 주제가 되어버린 듯하다. 어떤 관점과 해석이라고 하는 건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임의적인 것이며 나는 타인을 알 수 없다. 이에 대한 영화의 해답 중 하나는 <굿 윌 헌팅>에서 찾을 수 있는데, 윌의 친구가 윌에게 '나는 너를 모른다. 하지만 나는 네가 어땠으면 좋겠지는 안다'는 뉘앙스의 말을 내뱉는다. 타자의 불가해함을 인정하고 자신의 소망으로 회귀하는 태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은 대응일지도 모른다.


2.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찾아내려 할까. 그의 작품들 전반에서 느껴지는 정조라는 게 있다면 아마 끊임 없이 카메라를 비추면서도 답하기를 거부하는 '고집스러운 우유부단'의 정조라고 볼 수도 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서사 속에서 어떤 직선적인 방향성이 존재한다기보다는, 어떤 이들을, 어떤 현상을 그저 끊임없이 따라가서 담아내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런 시선을 다큐멘터리적이라는 표현으로 평탄화하는 건 다소 부당하다고 느껴진다. 그러니까 좀 더 그의 태도를 자세히 묘사하자면 적절한 답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시대의 질문에 응답하기를 거부하는 현상학자적인 모습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여기서는 아직 답 할 수 없습니다. 후속 연구에서 답변드리지요"라면서 학술대회장에서 도망나가는 교수처럼 그는 끊임없이 비추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도망간다.


3.

그런 그가 부분적 답지를 내놓기 시작한 건 <어느가족>에서인데, 그의 답안은 기성세계의 수정이 아니라 대안적 세계의 현전이다. 말하자면 리얼리즘을 가장한 일종의 판타지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초점은 <괴물>에 이르러 점점 고조되고 있는 양상이다.


괴물은 그 점에서 흥미로운데, '나는 당신을 모른다'라는 낡은 주제를 '나는 당신을 모른다. 그럼 이제 어찌해야하지'라는 질문으로 데리고 가면서 담론의 경계 밖으로 나가려는듯한 모습이다. 그리고 그 방법은 나의 세계를 해석이라는 칼날로 침범하려는 타자를 외부에 격리시키는 것이다. 버스라는 인공 인큐베이터는 일종의 바리게이트 역할을 수행하며 동시에 미나토와 요리를 잉태하는 자궁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땅을 기어 제 2의 탄생을 달성하고 그곳은 마치 아담과 이브가 세계의 축복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에덴동산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단절은 세계를 극복하기보다는 대안 현실로 인물들을 잠시 도피시키는 퇴행적 전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마치 하늘을 날아오르던 이카루스가 자신의 날개를 스스로 부러뜨리고 바닥으로 곤두박질 치는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그럼에도 고레에다 감독의 차기작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그가 이 일시적 퇴행의 이미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답을 찾아낼 거라는 모호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그가 앞으로 마술적인 현실을 향해 계속해서 날아오를지 아니면 현실에 발붙여 답을 찾아낼지 그 방향을 알 수 없기에 그의 동시대 영화를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크나큰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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