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신고은 작가를 만나다
2026년이 시작되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작년 어디쯤에 고여 있는 기분이다. 남들은 본업에 부업까지 열정을 불태우는데, 나는 왜 새해 첫 달부터 이렇게 권태로운 걸까. 대가들을 인터뷰하고 좋은 콘텐츠를 만들며 뿌듯함을 느끼다가도, 돌아서면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은 막막함이 밀려온다. 나는 왜 이렇게 성실하게 허덕이면서도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내 의지력이 부족한 탓일까?" "나는 왜 이렇게 머리가 굳어 있을까?" 자책의 화살이 나를 향할 때쯤,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렷한 눈동자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심리학자 신고은 작가.
그녀를 만나 1월부터 찾아온 인생의 권태기, 그리고 우리가 타고난 '기질'에 대해 물었다. 우리가 왜 자책을 멈추고 자신에게 더 너그러워져야 하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를 찾고 싶었기 때문이다.
Q. 1월은 분명 한 해의 새로운 시작인데, 왜 벌써 권태롭게 느껴질까요?
신: 인생의 권태기가 오신 것 같아요. 오랜 연인을 만나면 더 이상 흥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내 인생도 반복되다 보니 흥미가 점점 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죠.
미국에 엘리자베스 던(Elizabeth Dunn)이라는 심리학자가 있는데, 장기연애를 했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남자친구가 나에게는 친절하지 않고 타인에게만 친절하다고 느껴졌대요. 괘씸하잖아요. 심리학자들은 삶의 어려움이 생기면 연구를 하거든요. 오랜 연인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는데, 예상했던 대로 장기연애를 한 사람들이 서로에게 보다 낯선 타인에게 더 친절했다고 해요. 심지어 낯선 이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자신의 모습에 기분도 좋아졌다고요. 그러다 보면 안 좋은 선택을 하기도 하고요.
Q. 연인에게도 권태기가 오는데, 더 오래된 내 인생은 어떨까 싶어요. 이 권태기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죠?
신: 저는 그래서 1월을 '인생을 낯설게 하는 달'로 표현하고 싶어요. 살다 보면 내 인생에 권태기가 와요.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고 새로운 것도 없고... 그럴 때 인생을 낯설게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장기연애를 할 때, 매일 하던 데이트 말고 새로운 데이트를 해보는 것처럼요. 내 삶에도 낯선 도전들을 만들어서 의욕을 다시 샘솟게 하는 거죠.
Q. 그런데 사람에 따라 낯선 걸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늘 먹던 밥을 먹고, 늘 가던 곳을 가는 걸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요.
신: 새로운 게 나오면 다 해보는 사람이 있고, '그런 걸 왜 먹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경험에 대한 개방성에서 오는 차이예요. 기질적으로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 낮은 사람들이 있어요. 이런 분들은 여행 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고, 가서도 익숙한 장소와 익숙한 음식을 선택하시죠.
저도 개방성이 낮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낯선 걸 잘 도전하지 않아요. 어느 정도냐면, 저는 화려하고 비현실적인 영화를 좋아하는데 남편은 잔잔한 일본 영화를 좋아해요. 저희가 7년을 연애했는데, 그 기간 동안 한 번을 같이 안 봤어요. 그러다 결혼하고 나서 어느 날 너무 심심해서... 남편이 추천한 일본 영화를 봤는데, 역시나 너무 재미가 없는 거예요. 너무 잔잔했죠. 그런데 그날 밤 잠자리에 누웠는데 갑자기 잔상들이 남으면서, 마음이 간질간질한 거예요. 음악도 다시 들어보고 싶고. '아, 이게 일본 영화의 묘미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마다 내가 정해 놓은 삶의 방식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게 재밌어!', '이게 좋아!'라고 정해 놓은 방식 말고도 나를 즐겁게 할 수 있는 영역이 분명히 있거든요. 처음부터 막고 시도조차 안 해보면, 어쩌면 내게 즐거움을 줄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럼 아쉽잖아요.
Q. 새로운 경험이 내게 기질적인 불호여도, 한번 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네요. 그런데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다르다면, 유행하는 '갓생 루틴'이 모두에게 맞진 않을 것 같아요. 개개인에게 맞는 새해 계획을 세우는 팁이 있을까요?
신: 기질이란 타고난 정서적 호불호를 뜻해요.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좋아. 나는 이렇게 사는 건 싫어. 그런 선천적인 호불호 있잖아요. 이건 사실 바꾸기 어렵거든요.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좋고, 싫고 가 이미 정해져 있는 거죠. 이걸 파악하지 못하고 사회가 생각하는 '올바른 기준'에 자기를 끼워 맞추면 힘들어질 수 있어요.
TCI 기질 중에는 '자극 추구'라는 기질이 있습니다. 새로운 거, 재밌는 거, 보상받는 걸 좋아하는 거죠. 자극추구가 높은 분들은 계속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도전하고 싶어 해요. 반면 자극추구가 낮으신 분들은 관습적이고, 뻔히 정해져 있고, 매뉴얼대로 루틴화된 것을 따라갈 때 편안함을 느껴요. 자극추구가 낮은 분들은 자극추구가 높은 사람들이 열심히 새로운 일을 벌이는 걸 보며 위축되기도 해요. 특히 요즘은 크리에이터가 많이 생기고 있잖아요. 직장을 다니면서도 계속 사이드 잡을 확장하는 크리에이터 분들을 보면서 '지금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게 맞는 건가? 나는 왜 이렇게 머리가 굳어 있을까? 나는 왜 시키는 것만 하는 게 편할까?' 생각이 들죠.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을 조금 미워하게 될 수 있겠죠.
또 다른 기질 중에는 '위험 회피'가 있습니다. 무서운 거 싫고, 혼나는 거 싫고, 손해 보는 거 싫은 그런 경향이에요. 위험회피가 높은 분들은 새로운 도전을, 새로운 경험을 하기 두려워해요. 위험회피가 낮은 사람들은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들이 겁이 안 나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평온하고 안정적이라면, 위험회피가 놓은 사람들은 예기 불안이 강한 거예요.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앞에 있으면 엄청나게 긴장이 돼요. 그런데 불안이 높은 덕분에 그만큼 미리 대비할 수 있어요.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면, '어떡하지!' 하며 계속 불안에 떠는 게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는 생각보다 타격이 크지 않으세요.
그러니까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기질이라면, '나한테 어떤 강점이 있을까'를 생각해야지 '난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Q. 새해 기운 받아서 새롭게 바뀌고 싶은데, 목표한 계획을 끝까지 이어나가기 쉽지 않아요. 그럴 때마다 '내 의지력은 왜 이모양일까!' 자책하곤 합니다.
신: 이것도 기질로 설명할 수 있는데, 바로 인내력입니다. 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지금의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는 힘을 말해요. 인내력도 사실 타고나는 기질이거든요.
그런데,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어쩌면 스스로 생각하기에 인내력이 낮다는 건, 지금의 나에게 만족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목표가 있긴 한데, 사실은 엄청나게 간절하지 않은 거예요. '나 지금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하는 마음이 있으니, 동기가 안 생기고, 동기가 안 생기니 노력을 덜 하게 되고, 그러니 결과물이 부족해 보여요. 결과적으로 봤을 땐, 인내력에 문제가 있다고 스스로 의심하게 되는 거죠.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하는 중에 배가 너무 고파요. 결국 못 참고 쿠키를 먹으면서 생각을 하는 거예요. '내가 꼭 살을 빼야 될까?'(하하) 물론 날씬하면 좋죠! 그런데 내가 무슨 연예인 할 것도 아닌데... 나는 이 정도도 사실은 만족하니까 그만큼의 동기가 안 생기는 거예요. 만약에 제가 몸으로 먹고살아야 되는 직업을 가졌다면 다이어트 열심히 하겠죠. 정리해 보자면, 의지력이 의심되는 영역이라면, 사실 내가 그만큼 간절하지 않은 영역이어서 그럴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면서 너그러워지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실제로 저도 TCI 검사에서 인내력이 매우 낮게 나오거든요(100점 만점에 3점이 나와요). 하지만 인내력을 이길 수 있는 성격 요인이 있는데, 그게 바로 목적의식입니다. '나는 책은 꼭 써야 해', '강의는 꼭 해야 돼'라는 목적의식 있으면 인내력이 없는 사람들도 그 부분에 있어서는 동기가 생기면서 극복이 됩니다. 그래서 인내력을 높이는 게 아니라 어떤 과제를 내가 왜 해내는지 그 목적이 무엇인지 본질적인 고민을 해 보시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앞서 언급한 엘리자베스 던의 연구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연구자들은 장기 연애 중인 커플에게 일부러 요청했다. 연인에게도 처음 만난 사람처럼, 좋은 인상을 주려고 행동해 보라고. 대화 내용은 평소처럼 해도 되지만, 처음 만났을 때처럼 조금 더 집중해서 듣고, 조금 더 친절한 태도를 선택하라고. 심리학에서는 이를 ‘긍정적인 자기표현(affective self-presentation)’이라고 한다.
"Just have a regular conversation with your partner, talking about whatever you want,
but try to make a good impression on him (her), the way you would with a person you
just met or had just started dating."
그러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평소보다 더 웃고, 더 공손하게 말하고, 더 배려하는 태도를 취한 그 순간에
상대방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기분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이런 연구 결과를 보면 관계든, 삶이든, 오래될수록 권태가 생기는 이유는 새로움이 사라져서라기보다, 내가 더 이상 잘 보이려 하지 않기 때문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와 똑같은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나 자신에게 조금 더 다정하고 설레는 눈빛을 보내봐야지. 마치 처음 만난 근사한 사람을 대하듯.
(참고)
Dunn, E. W., Biesanz, J. C., Human, L. J.,& Finn, S. (2007). Misunderstanding the affective consequences of everyday social interactions: The hidden benefits of putting one's best face forward.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92(6), 990-1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