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았는데 상대가 알아주기를 바랐던 적이 있다.
힘들다고 표현하지 않아도 눈치채 줬으면 했고, 원하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먼저 건네줬으면 했다.
그런데 상대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고, 그것이 섭섭함이 되었다.
이성적으로는 말하지 않은 것을 어떻게 아냐고 스스로를 달래지만, 감정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이 감각은 굉장히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많은 관계를 조용히 갉아먹는 패턴이다.
심리학에서는 이것을 '마음 읽기 기대'라고 부른다.
상대가 자신의 감정과 필요를 말없이도 알아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믿음이다.
이 기대는 대부분 생애 초기 경험에서 형성된다.
아기는 언어가 없다.
울음과 표정만으로 배고픔과 불편함과 두려움을 전달한다.
그리고 충분히 민감한 양육자는 그 신호를 읽어내고 반응해 준다.
그 경험이 반복되면서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표현되기 전에도 이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학습한다.
문제는 그 학습이 성인이 된 이후에도 관계의 기준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진짜 나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야 한다는 등식이 만들어진다.
역설적으로 관계가 가까울수록 이 기대는 더 커진다.
낯선 사람에게는 말을 해야 안다고 생각하지만, 오랜 친구나 연인에게는 그 기대가 훨씬 높아진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많이 실망하는 일이 생긴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의 연구에서도 확인되듯, 사람은 타인이 자신과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느끼는 것을 상대도 느낄 것이라는 가정이다.
하지만 타인은 나의 내면에 접근할 수 없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줬으면 한다는 마음 안에는 또 다른 감정이 있다.
표현했다가 거절당하는 것이 두렵거나, 원하는 것을 직접 요청하는 것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지는 감각이다.
알아서 줄 때의 감동과, 말해서 받을 때의 감동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도 그 이유다.
자발적으로 건네진 것은 사랑의 증거처럼 느껴지고, 요청해서 받은 것은 덜 진짜인 것 같다는 감각.
그 감각이 표현을 막고, 침묵이 섭섭함이 되고, 섭섭함이 거리를 만든다.
가까운 사람에게 유독 말 못 하고 쌓아둔 것들이 있다면, 한 번쯤 물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것을 말하지 않는 것인지, 말하지 못하는 것인지.
그리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그 마음 안에, 사실은 먼저 건네고 싶었던 말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