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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클롱 Nov 18. 2020

사회생활의 피난처가 되어준 나의 작은 집

2017년 10월의 B430 : 미니어처 하우스

2017년 10월의 B430 : 미니어처 하우스

 그해 가을은 인생의 암흑기였다. 사회생활 1  병아리 회사원인 나와 회사 밖에서의 나를 분리해낼 재간이 없었고, 내가 나에게 짊어지운 스트레스는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나를 압박했다. 어떤 날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던 셔틀버스에서 숨이  쉬어지지 않아 당장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그날 아침에도  출근을 했고 웃으며 좋은 아침을 말했다)


 대단한 도전을 할 에너지도 없었지만, 또 절박하게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기도 했다. 멘탈이 터져서 실수에 실수를 더해버린 날, 스스로가 너무 실망스러워서 평소와 전혀 다른 말투로 분노가 섞인 사과 메시지를 단톡방에 남겼다. 팀원분들이 내 기분을 살피는 모습을 보고 무언가 조치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는 전부터 눈독 들여왔던 미니어처 하우스 키트를 구매했다. 불도 들어오고 지붕도 있는 작은 온실의 가격은 3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실제와 닮은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클레이로 밥상을 차려내고, 샤프심 통으로 핸드폰을 만들고, 포스트잇과 종이로 엠피쓰리를 만들었다. 완성도가 꽤 높았기에 수업시간에 종이 엠피쓰리를 가지고 놀다 본의 아니게 선생님을 농락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낯부끄럽고 죄송하지만 그땐 그게 참 뿌듯했다...) 무엇하나 내 맘대로 돌아가지 않았던 회사일과는 달리, 틀리면 틀린 대로 느긋하게 즐기는 만들기 키트는 잃어버린 성취감을 안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문한 키트가 도착하고, 퇴근 후 나의 일상은 곧 미니어처 하우스 제작이 되었다. 온실 하나를 만드는 데에는 꽤 많은 공수가 들었다. 선반마다 화분이며, 물뿌리개며, 삽이며 가득가득 채워 넣어야 집이 비어 보이지 않았다. 하루에 열개 정도의 부품을 만드는 것이 목표였는데, 하기 싫은 날엔 손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완성하는 데에 한 달은 넘게 걸렸던 것 같다. 그 한 달 동안 작은 집은 내 도피처였다. 손가락을 잔뜩 세워야 겨우 잡히는 작은 화분들을 낑낑대며 만지고 있노라면 오늘 한 실수는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이파리를 모양대로 자르고 떨어지지 않게 붙인다는 생각뿐이었다. 꽤 성가신 작업들이 많았음에도 현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집을 완성한 것은 어느 날 새벽 다섯 시 반이었다. 어김없이 녹초가 되어 집에 오자마자 침대에 누웠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세시쯤 눈을 떴다. 화장실을 갔다가 나오는데 미완성의 집이 보였다. 왠지 오늘은 이것을 끝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졸린 눈을 부벼가며 벽을 세우고, 불을 달고, 선반을 채우고, 문을 달았다. 그날은 모처럼 뿌듯한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그동안 최악의 슬럼프도 그럭저럭 지나갔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마음으로 수행하듯 만들었던 나의 2만 7천 원짜리 집. 그때의 기분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많은 것을 배운 시기로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은 이 작은 도피처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우리 집도 2만 7천 원에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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