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었던 '완벽한 판'의 역설

대안학교를 그만둔 이유

by Architect

2020년 코로나라는 유례없는 혼돈 속에서 나는 결단했다. 정답 없는 교육, 영혼을 지키는 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대안학교로 옮겼다. 사교육이 없고 미디어가 통제된 그곳이야말로 내가 꿈꾸던 '완벽한 판'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26년 오늘, 나는 그 판을 나왔다. 학교가 나빠서도, 아이들이 적응하지 못해서도 아니었다. 그 '판' 안에 숨어있던 나의 지독한 '위선'과 마주했기 때문이다.



1. 영어 교사의 딸이 영어를 못하는 게 뭐가 어때요?

대안학교로 옮기면 모든 불안이 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장소만 바뀌었을 뿐, 내 안의 '정답 강박'은 그대로였다. 아이가 숲에서 뛰어노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은 '이러다 나중에 뒤처지면 어쩌지?'라는 공포로 가득했다. 영어 교사인 내 딸이 알파벳조차 서툰 것을 견딜 수 없었던 나는, 자유로운 학교 뒤편에서 아이를 은밀하게 다그쳤다.


그때 만난 핀란드 교육 전문가의 한마디는 내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영어 교사 딸이 영어를 못하는 게 뭐가 어때요? 그게 왜 문제죠?"


그 순간 깨달았다. 아이가 처한 진짜 환경은 사교육 없는 학교가 아니라, '불안에 절어 아이를 채근하는 엄마'라는 공기였다는 것을. 나는 오염된 물을 '대안'이라는 이름의 예쁜 컵에 옮겨 담았을 뿐이었다.



2. 좋은 엄마와 완벽이라는 이름의 연극, 위선의 냄새

대안학교 학부모라는 정체성은 나에게 또 다른 훈장이자 감옥이 되었다. "우리는 깨어 있는 부모여야 한다"는 강박은 내 목소리를 더 우아하게 만들었지만, 내면의 수축은 더 심해졌다. 겉으로는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척 미소 지었지만, 속으로는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좋은 엄마'라는 완벽한 역할 모델을 연기하느라 내 허리는 다시 끊어질 듯 아파왔다. 대안교육이라는 판이 나를 구원해 줄 것이라 믿었던 것은, 사실 내 내면의 불안을 마주하기 싫어 선택한 '고결한 도피'였다.



3.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판이다

결국 나는 대안학교라는 물리적 공간을 나왔다. 환경이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진짜 환경 설계가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환경 설계는 아이를 좋은 곳에 데려다 놓는 것이 아니다.


사람: 내가 먼저 내 불안을 직시하고, 정답이 없어도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 번째 샘플'이 되는 것.


시스템: 어떤 학교에 다니느냐보다, 매일 아침 아이와 내가 어떤 리듬으로 연결되는지의 구조를 짜는 것.


서사: 아이를 내 불안의 투사체가 아닌, 자기만의 길을 가는 독립된 존재로 목격하는 것.



다시, 나라는 판으로

학교를 나온 지금,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이 선택의 의미를...

그래도 이제 나는 대안학교냐 공교육이냐는 이분법적 정답에 목매지 않으려 한다. 내가 설계해야 할 진짜 판은 거창한 교육 기관이 아니라, 오늘 내가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내 결핍을 다스리는 나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깨달음은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면, 왜 나는 수많은 자기계발 도구를 쓰면서도 여전히 제자리일까?" 3부에서는 내가 그토록 매달렸던 PDS 다이어리와 정리 자격증이 왜 내 삶을 바꾸지 못했는지, 그 시스템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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