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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봄 Nov 23. 2020

11. 육아의 역설

우리는 일을 할 때 시작과 끝을 경험한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예로 들면 착수일부터 준공까지 여러 사건이 발생한다. 작업을 관습대로 진행하기도 하고, 문제점을 찾아 개선하기도 한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이전과 다른 결과를 산출하는데, 이는 일시적이다. 대부분의 업무는 시간이 흐르면 변화한 환경에 맞춰 또 다른 수정을 요구한다. 기존의 성과를 부정하고 고도화 혹은 선진화라는 작업을 필요로 한다. 개인적 성장이나 역사적 발전을 보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 어떤 일은 끝이 없다. 육아가 좋은 예다. 아이가 태어나 성인이 되어 독립했다고 가정해보자. 부모의 역할이 끝난 것일까? 아니다. 출가를 하더라도 부모의 걱정은 끝나지 않는다. 아이가 영유아기에는 상대적으로 많은 돌봄이 필요한데,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되면 간섭이 늘어난다. 돌봄과 간섭은 대립한다. 간섭을 받던 아이는 이제 성인이 되어 독립을 경험한다. 그렇다고 부모와 불가분적 관계는 아니다. 돌봄은 간섭으로 그리고 독립으로 발전한다. 때로는 부양이라는 다른 관계로 변화하기도 한다.


매듭이 있던 없던, 둘의 공통점은 모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행동이 항상 완벽할 수 없다. 부작용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모순은 둘의 간극에서 발생한다. 위선을 가장해 호위를 베풀고, '다 너를 위한 일'이라며 강요하며, 사랑이라 말하고 구속한다.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그 단계를 극복하면 안정과 여유가 찾아온다.


이런 변화하는 과정을 마르크스는 변증법이라는 논리구조로 설명한다. 그는 변증법을 3가지 과정으로 정리한다. 첫째 대립물간에 모순이 있어야 한다. 둘째 모순이 양적 변화를 지나 질적 변화로 나아가야 한다. 셋째 도출된 결론을 부정해 변증법을 다시 나아간다. 우리는 보통 이를 '정. 반. 합'이라고 칭한다.


나는 아이와 함께 하는 일상을 변증법에 대입시켜 본다. 정(正)은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다. 평일 일과는 단출한데 7시쯤 저녁 식사를 하며 서로의 일과를 나눈다. 친구 이름, 재미있던 일, 점식 메뉴, 방과 후 수업과 학원에서 배웠던 것들을 묻곤 한다. 식사를 마치면 아이에게 같이하고 싶은 게 뭔지 묻는다. 책 함께 읽기, 종이접기, 산책, 자전거 타기 등을 같이하곤 하는데, 아이는 종이접기를 제일 좋아한다.


아이는 책을 볼 때 나무늘보 같다 종이접기를 시작하면 표범으로 변신한다. 색종이 모서리를 맞추고 쉬익 소리를 내며 과감히 접을 때 눈매가 날카롭다. 나를 가르칠 때는 숙달된 조교로 변모한다. "잘 보며 따라 해~"라는 말로 기합을 넣는다. 나는 몇 번 따라 하다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아~ 모르겠어. 진짜 어렵다. 잘 안되네"라고 엄살을 부린다. 그러며 아이는 "내가 도와줄게!" 하며 대신 종이를 접어준다. 그러길 몇 차례 반복하면 아이는 한숨을 푹 쉰다. "이거 처음엔 어려운데 다시 내가 하는 거 잘 봐봐 알았지?"라고 한다. 내가 따라 하면 아이 눈빛은 초롱 대며 빛난다. 아빠에게 가르쳤다는 자신감과 종이 접기는 아빠보다 한 수 위라는 자부심이 얼굴에 가득하다.


반(反)은 밤 9시에서 10시 사이이다. 아이를 키우며 종종 모순을 맛보는데, 아이가 잠자리에 들 때이다. 빨리 아이를 재우고 내 시간을 갖고자 하는 갈망이 솟아오른다. 침실로 들어가기 전, 나와 아이는 일종의 의식을 행한다. 아이는 졸린 눈으로 "아빠 나 이제 자러 갈래. 인사하자."라고 한다. 나는 양팔을 한 아름 벌려 아이를 품에 안는다. "하고 싶은 말 있어? 기분은 어때?"라고 묻고 눈을 맞춘다. 아이는 잠시 생각을 한다.

"음... 오늘 재미있었어"

"그래? 뭐가 제일 재미있었어?"

"음... 학교에서 로봇 만들었어"

"아 그래? 방과 후 수업에서? 그랬구나."

"응. 이제 나 잘래"

"얼른 가서 자~"

"아빠. 우리 내일도 재미있게 놀자."

"사랑해." 하고 나는 아이의 등을 토닥거린다.


합(合)은 아이가 침실에 들어간 후이다. 놀이로 양적인 변화를 겪고, 질적 변화로 나아가는 시간이다. 나는 아이와 취침 인사를 할 때 두 가지 감정이 든다. 하나는 '더 잘 놀아주지 못한'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이다. 다른 감정은 '이제부터는 내 시간'이라는 반가운 설렘이다. 상반된 두 개의 감정은 나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아이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반전의 순간은 시간의 벽으로 과거와 미래를 곱씹는 변곡점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과 나를 위한 시간은 아이가 커 감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변증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마음과 맞닿아있다.


우리는 변화를 대하는 자세가 저마다 조금씩 다르다. 나는 외부 환경 변화에 민감하지만, 심적인 변화를 알아채는 것은 둔한 편이다. 외부환경이 빠르게 가속하기 때문 인 것 같다. 그로 인해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행위는 상대적으로 소홀해지는 게 아닐까. 순간적으로 감정이 변하면 그제야 인지한다. 내게 그 순간은 사랑한다는 단어가 음성으로 나올 때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모순된 두 개의 감정이 하나의 언어로 발현할 때, 그 찰나는 나를 일깨운다. 그래서 내게 '취침 인사'시간은 참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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