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혼돈의 시대다. 함부로 아파서도 안 된다. 행여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응급치료받을 종합병원이 없다. 정부와 의사협회가 권한, 책임, 명분, 실리를 두고 지난한 싸움을 하는 사이, 애멀게도 시민들의 생명권만위협을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도 오랜 시간 이어지니, 그다지 큰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 찢어진 이마를 치료하기 위해 응급차에 타고도 무려 12곳의 병원으로부터 거절받았다는 어느 유력 정치인의 하소연도 묻히기에 이르렀다.정말 아파도 찾을 병원이 없을 정도로 각자도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비단 의료 시스템만 문제가 아니다. 최근에는 누구나 사용하는 온라인 쇼핑몰 시스템에도 커다란 균열이 생겼다. 티몬과 위메프, 이른바 티메프 사태로 인한 피해 금액만 무려 1조 원을 넘었다. 티몬 할인 쿠폰을 활용해 생애 첫 효도 여행상품을 구매한 사람들이 여행은커녕 결제대금마저 환불받지 못하고 있다는 어처구니없는 사연이 속출했다. 꿈이 사라진 자리는 분노가 차지한다. 돈이 눈 녹듯 사라지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컴퓨터, 휴대전화, 가전제품 등 고가의 상품을 온라인에서 판매한 사업자들의 경제적 피해는 훨씬 심각하다. 많게는 기업당 수십억 원을 정산받지 못했다. 티몬과 위메프가 7월에 지급불능을 선언하고, 바로 기업회생을 신청했으니, 5월~6월 판매대금은 전부 미정산 상태다. 대금정산은 사실상 물건너갔다. 티몬과 위메프는기업들의 2달 치 상품 판매대금 약 1조 원을 소비자들로부터 결제받은 뒤, 이 돈을 전부 다른 데 써버렸다.
나스닥 상장 추진자금이니, 회사 인수대금이니, 프로모션 자금이니 말은 많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최고경영진들은 개인재산 출연을 해서라도 사태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노라 약속하지만, 그저 말의 향연일 뿐이다. 2개월이면, 개인재산을 처분해 스위스 계좌에 넣어두거나, 비트코인 지갑에 은닉하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연간 수십억 수백억의 매출액을 달성 중인, 탄탄한 재무구조를 지닌, 수십 명 수백 명의 직원을 고용 중인, 중소·중견기업들이 고스란히 흑자 부도의 위기에 처했다. 혹자는 그러기에 왜 자본잠식에 처한 티몬이나 위메프 같은 쇼핑몰과 거래하냐며, 기업들 스스로 책임질 사안이라 비판하기도 하지만, 그건 억지다. 수백만 명이 매일 상품과 서비스를 사고파는 유명 플랫폼은 이미 우리 사회의 공인된 네트워크라고 믿어도 무방하다. 판매자와 소비자 간 거래비용을 절감시켜 주는 대형 온라인 쇼핑몰에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사회 시스템의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우리는 정말 기댈 곳 하나 없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오늘도망연자실한 기업가들의 원성이 나의 귓가에 전해진다. 정부 당국자 미팅, 지역구 국회의원 면담, 언론사 인터뷰를 한다고 해서 당장 메마른 회사 곳간이 채워질 리없다. 기획하고, 구매하고, 생산해서 상품을 판매한 결과가 대금 회수 불능, 플랫폼의 파산 선언이라니, 눈 뜨고 코를 베인 격이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중소기업들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흑자 부도라는 아이러니(Irony)를 떠안고 사라질 위기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티메프 피해기업의 임직원과 주주들, 이들과 거래 중인 매입-매출 거래처들, 티메프 외상매출금을 담보로 운영자금을 선 정산해 준 은행들, 이 기업들로부터 부가가치세와 법인세를 받아 나라 살림을 꾸려야 하는 세무 당국에 이르기까지, 선의의 피해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피해 금액은 날로 증가세다.
이제 선택의 시간이다. 책임질 자들은 분명히 가려내 강력히 처벌하고, 피해기업들 중에서 유동성을 공급하면 현재의 일시적 어려움을 이겨내고 계속기업으로 생존할 수 있을 법한 회사들을 가려내 신속하고 과감하게 지원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회사 하나를 죽이고 살리는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지금이 포기하고 싶은억울한 피해자들에게 믿고 의지할 최후의 보루, 즉 국가적 시스템이 존재함을 알릴'증명의 시간'이다.
병원과 기업은 사람의 삶과 죽음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공교롭게도 지금은 의료분야와경제분야 모두 정부의 적극적이고 지혜로운 역할이 빛을 발해야 할 시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각자도생 하는 것처럼 보여도실타래처럼 니캉내캉 엮여 사는 우리는, 결국 같은 하늘 아래 같은 시대를 산다.
2016년, 이승철은 <일기장>을 발표했다. 이루어지지 못할 짝사랑의 아픔을 써내려 가지만, 혼자만의 사랑은 <일기장>에 점, 점, 점, 점만 찍다가 마침내 끝나고야 만다는슬픈 노랫말을 담은 발라드곡이다. 지천명의 나이(50)에 이른 가수가 부르기엔 다소 어색한 가사로도 읽힌다. 진성과 가성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승철의 가창이 여느 때보다 두드러지는 화려한 멜로디의 곡이기는 하지만, 그의 노래실력과는 별개로,<일기장>은 대중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 겸 프로듀서인 <용감한 형제>가 이승철을 향한 오랜 팬심을 고백하며, 그를 위해 만든 인생 최초의 발라드곡이 <일기장>이라고 밝힌 에피소드가 방송을 탔다. 이 내용을 전해들은 이승철도 기분 좋기는 마찬가지, 게다가 곡의 멜로디도 맘에 들었다. 그에겐 히트곡을 감별하는 좋은 귀를 가졌다는 자부심도 있었기에, 이쯤 되면 <일기장>의 히트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하지만, 인생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때로는 완벽하게 조성된 환경이 성공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인생의 묘미는 의외성에 있다고 하던가. 30년 차 라이브 황제의 <일기장>은, 결국 제목처럼 품 안에 소중히 간직하고픈,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추고도 싶은 <일기장> 같은 노래로 남게 되었다.
자신을 향한 헌정(Tribute), 오마주(hommage: 존중을 뜻하는 프랑스어)의 뜻이 담긴곡을 받을 정도의 위치에 선 사람이기에,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아 든 거장의 어깨는 한층 무거웠을 터다. 겉으로는 애써 덤덤한 척한다지만, 속까지 편할 수는 없다. 더구나,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닌 밴드 마스터 아니던가.
그는 아내와 딸들을 책임져야 할 한 집안의 가장임과 동시에 전속 매니저, 엔지니어, 편곡가, 작곡가들을 품 안에 둔 기획사의 수장이자, <이승철과 황제>라는 거창한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는 밴드의 마스터이기도 하다. 여느 기업가와 다를 게 없다. 늘 일거리(행사, 방송, 무대)를 찾고, 때 되면 새로운 상품(앨범, 콘서트)을 기획하고 출시(launching) 해야 하는 최고경영자다.
매달 인건비와 일상적인 비용은 오롯이 그의 몫이다. 밴드 멤버들은 최고의 가수와 함께하는 일류들이기에남보다 더 좋은 대우를 해 줘야 한다. 경력이 쌓일수록 품위유지비도 늘기 마련이다. 동료후배 가수들과 식사라도 한다 치면, 명색이 이승철이 어디 가서 밥 얻어먹고 다닌다는 얘기가 나와서는 안된다. 그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늘어도, 그가 기댈 곳은 줄어든다. 밴드 마스터는 외롭고, 무섭고, 버겁다.
큰맘 먹고 남을 속이려고 작정한 일부 몰지각한 사기꾼들을 제외하면,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대부분의 CEO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저당 잡힌 채 사업을 영위한다. 따라서, 한번 기업인의 길에 들어서면, 웬만하면 빠져나갈 도리가 없다. 제아무리 이기적인 욕심에서 시작했다 하더라도, 회사가 성장할수록 책임져야 할 몫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나아가게 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 ESG 경영 같은 성과물도 기업 활동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산물이다.
서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보람과 만족감, 여기서 파생되는 자발적 책임감을 토대로, CEO 그리고 밴드 마스터는 설령 외롭고, 무섭고, 버거워도,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위기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한다. 대혼돈의 시대, 바로 지금이 사회 시스템이 아직 붕괴하지 않았음을 증명할골든-타임이다. 기업가정신을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