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텔 당번 4개월
회사를 퇴사하기 전 2년을 고민했다.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빵과 커피, 책을 좋아하니 1순위로 <북카페>가 떠올랐다. 그러나, 말이 좋아 북카페지 우아한 사장님이 될지는 몰라도, 돈 버는 사장님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생계형 창업가에게 그림 같은 풍경은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빵과 커피를 소비하는 건 자신 있지만, 맛있게 만드는 건 자신 없었다. 생각해 보니, 빵과 커피만이 아니다. 남들 앞에서 내세울 만한 특기도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소비자에서 생산자로의 피봇팅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이 훌륭한 사업 파트너를 찾는 일이었다. 만나는 고객들이 전부 회사 CEO들이었기에 내겐 더할 나위 없는 환경이 주어진 셈이다. 중소기업은 항상 자금과 전문인력을 필요로 하기에, 최고경영자와 핏(Fit)만 맞는다면, 미래 성장성이 높은 기업을 찾아 투자자 겸 재무책임자(CFO)로 합류할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쉽게 찾아올 리 만무하다. 내가 상대방을 마음에 들어 하면, 상대방은 나를 성에 차지 않아 하고, 나를 원하는 상대방이 나타나는 경우엔 왠지 내 마음이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러던 중 J를 만났다. 작년 초였다. 그는 '호텔 숙박업'을 영위하는 CEO다. 내 입장에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분야였다.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CEO에게 특별히 매료되지도 않았다. 복잡한 시설자금 건이었기에 신중하게 접근할 따름이었다. 장기저리의 '관광진흥기금대출'이라는 자금특성상 관광호텔을 신축하려는 그에게도 도움이 되고, 우리 지점의 1년 실적에도 도움이 되리라는, 그리고 실적 달성에 나의 지분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지극히 K-직장인다운 생각이 전부였다. 그땐 그랬다.
평범하게 업무가 마무리되었다면, J와의 인연도 거기까지였을 거고, 아마도 나는 여전히 회사원이었을 테다. 역시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른다. 채권은행과 건설사 업무에 문제가 생기면서, 몇 개월 후 그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수십억짜리 프로젝트가 불투명해지고, 이미 수억 원을 손해 보았음에도, 그는 여전히 차분했고, 침착했다. 그 덕분인지, 나도 덩달아 차분하게 상황을 조망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 금액, 채권은행, 시공사 모두를 변경해야 할 상황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처음부터 다시였다.
내가 J의 진면목을 본 건, 그런 위기의 시간을 통해서다. 남 탓을 하지 않고, 과거가 아닌 미래에 집중하기. 일희일비하지 않고,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의 대안을 선택하기. 파트너 앞에서 평정심 유지하기 등. 그는 사업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매력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몇 개월의 시간, 몇 번의 업무적 교류와 면담 끝에 나는 그를 지지해 주기로 결심했다. 지점장님을 포함한 회사 내부 구성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한번 금융지원을 이끌어 냈다.
그로부터 또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고, 지금 나는 J가 운영하는 사업장(모텔)에서 청소 당번으로 근무 중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오늘이 당번으로서 마지막 출근 날이다. 퇴직을 결심한 후 벌써 5개월이 지났고, 난 이곳에서 4개월을 근무했다. 테헤란로 빌딩숲 뒤편, 한국은행 강남본부의 맞은편, 모텔 밀집지역에서 말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다지만, 소위 먹물인 경영학 박사가 묵은 떼를 모두 벗겨내기에 4개월은 충분치 않은 시간이다. 낮아진 자존감은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나는 객실 청소와 점검, 프런트 일과 손님맞이 업무에 서툴다. 절대적으로도, 상대적으로도 그러하다.
J를 향한 나의 존경심은 여전하지만, 아무래도 그 역은 성립하지 않을 터다. 솔직히, 그가 나에게 실망하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꾸준함과 성실함이 나의 주특기인 줄 알았는데, 출근이 괴로울 때도, 업무 중 집중하지 못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발레주차를 하다가 2차례나 접촉사고를 낸 일, 타국에서 힘들게 일하는 외국인 청소부에게 별다른 이유도 없이 짜증을 낸 일, 옆자리 동료와 언쟁을 벌인 일. 돌이켜보면 길지도 않은 시간인데, 부끄러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월급이 반토막 났다고 푸념할 일이 아니다. 어쩌면 수업료를 내고 다녔어야 할 직업학교에 근로 장학금을 받으며 다닌 셈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다. '돈 주고도 사지 못할 경험'은 이런 때를 두고 한 말이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우선은 5월 말로 이곳에서의 업무를 종료하기로 했다. 새롭게 인연을 맺은 파트너들과 숙박업 창업을 하기 위해서다. 물론, J의 조력은 디폴트 값이다. 대통령 선거일 아침, 파트너들과 인왕산을 등산하던 중 6월 말 개장을 목표로 야심 차게 추진하던 왕십리 프로젝트의 유보 소식을 들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예비 창업가로 보내야 할 시간이 늘어났다. 반대로 생각하면, 차분하게 준비할 여력이 생긴 셈이다. J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차분하고 침착할 때다.
지난 4개월은 <기억을 걷는 시간>이었다. 이른 아침 출근길은 과거 신의 직장 시절을 그리워하고 되뇌는 <기억을 걷는 시간>, 24시간 업무를 끝낸 후의 아침 퇴근길은 나태하고 무료했던 과거 신의 직장 시절 기억을 걷어내는 <기억을 걷는 시간>이었다. 지금의 나는 전자(前者)가 아닌 후자(後者)에 가까워졌다. 다행이다.
인공지능(AI)의 시대, 사무실에 앉아 펜대 굴리는 지식노동자의 전성기는 끝이 났다. 그보다는, 남들이 꺼려하는 3D 업종의 전성기가 도래할지 모를 일이다. 아니, 확실시된다. 관광산업은 K-콘텐츠의 핵심이다. 쾌적하고, 청결하며, 편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AI가 아닌, 人本의 영역임이 분명하다. 내가 하려는 숙박업은, 아이러니하게도, 미래지향적이다.
가만히 있으면 머리만 복잡해진다. 용산(청와대)의 새 주인이 결정되는 날, 나는 야놀자 평점 4.9점을 유지 중인 K 대표님의 노원구 사업장 24시간 청소 당번 체험을 신청했다. 오늘의 나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발적 실업자이지만, 행여라도 그 기간 동안 새 정부에서 제공할 수도 있는 경제불황 대비용 무상 급여/복지의 혜택은 거절하고자 한다. 정부의 혜택을 받는 소비자에서, 외화벌이와 고용창출에 기여하는 기업가가 되는 일, 그게 바로 애국 아니겠는가. 그리고, 애국의 시작은 '청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