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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리치(Super Rich) 이야기

운칠기삼(運七技三)

by 임요세프

흔히들 나이 예순은 은퇴할 시점으로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100세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인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60이 넘어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부자가 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러나, 이젠 고정관념을 타파해야 할 때가 된 듯하다. 당장, 내 나이가 60이 된다 해도, 우리 집 막내아들 녀석은 고작 스물셋의 대학생에 불과할 것이고, 난 그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들이 자기 밥벌이 이상을 넉넉히 해낼 수 있으리라 확신하지만, 아무래도 부모 마음은 좀 다른 것 아니겠는가. 최소한 뒷방 늙은이같이 신세 한탄이나, 라테 타령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나이 예순은 기업인들에게도 한창 왕성할 때다. 2세 경영, 주식 증여는 이야기는 아직 때 이르다. 가끔, 다른 곳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자녀를 본인 회사로 강제(?) 스카우트해서 가업승계를 준비하는 대표들을 마주하곤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겨우(?) 나이 예순에 본인은 뒤로 빠지고, 자녀에게 경영권을 넘기는 수렴청정(垂簾聽政)의 우를 범하지는 않는 듯하다. 경험과 지혜, 게다가 총기마저 여전한데, 굳이 자녀에게, 혹은 후세 경영인에게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을 위험을 미리 안겨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A와 B 부부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부부이자, 공동경영인이다. 벌써 십수 년째 공동사업자의 지위를 유지 중이다. 늘 생각하는 바이지만, 부부가 사업상 파트너일 경우 실패 확률이 가장 낮은 것 같다. 정확한 통계치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태껏, 성실한 부부 사업가에게 자금지원을 했다가 쉽사리 망한 경우는 보지 못했다.


단, 전제 조건은 두 사람 모두 허파에 바람 들지 않은(!) 경우다. 그래야, 한 사람이 투자에 공격적으로 접근하더라도, 다른 한 사람이 악마의 변호사(Devil’s Advocate)처럼, 생각지 못한 위험을 찾아내거나 뜯어말려서라도, 적절한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론과 협의를 거쳐 산출된 의사결정이어야, 행여나 일이 잘못되더라도, 누구 한 사람 탓하지 않고, 사업체든 가정이든 지킬 수 있고, 재기도 모색할 수 있으리라.

A와 B는 슈퍼마켓 여러 개를 운영하는, 이른바, 슈퍼-리치(Super-Rich)다. 그런데, 이게 단순히 말장난이 아닌 것이, 슈퍼마켓의 규모가 상당하다. 10여 년 전, 처음 본인들 명의의 슈퍼마켓 사업자를 낼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크게 성장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규모다. 오랜 세월, 부부가 함께 공동경영을 했기에 가능한 성취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부부 대표의 숫자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다. 동네마다 자리한 조그마한 구멍가게(?)부터, 신세계 이마트, 롯데마트와 경쟁할 정도의 규모인 슈퍼슈퍼마켓에 이르기까지. 언뜻 생각해도, 슈퍼마켓은 부부가 니캉내캉(!) 하면서 꾸려나가기에 제격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이 50에 타인 소유의 부동산에 임차로 첫 슈퍼마켓을 낸 후, 불과 10년 만에 7호점 대형 슈퍼마켓을 내는 일은, 아무래도 남다른 성취다. 게다가, 그들이 이번에 새로 오픈하려는 마트는, 무려 사업비가 3백억 원에 이르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토지 매입 비용 2백억 원에, 건물 신축 1백억 원에 이르는 <대형 슈퍼마켓> 신축공사는 큰 사업 기회임과 동시에, 그 이상의 위험(Risk)을 떠안고 있다.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나이 60의 개인사업자가 수억, 수십억 도 아닌, 수백억짜리 건물 신축을 하는 건, 일생일대의 모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자기 자본 투입액은 총 소요액 대비 30%에 불과하다. 시설 자금 대출로 무려 200억 이상을 추가로 조달해야 한다.

이 정도면, 거의 중견기업 프로젝트 수준이다. 자칫하면, 총 자산 500억, 매출 1천억, 종업원 수 300명 수준의 알짜배기 기업체 하나가 공중 분해될 수도 있는 수준의 투자 규모다. 심지어 최종의사 결정이 주주총회나 이사회 의결을 거친 것도 아니다. 단지, 부부간 합의가 필요했을 뿐이다.

인플레이션, 고금리 시대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연이율 5%, 아니 6%는 매월 이자 비용으로 지급해야 한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은행에서 신규 조달할 대출금 외에도 기존의 슈퍼마켓들 운영을 위해 이미 활용 중인 대출금도 50억 원은 된다. 대출금 총액이 2백5십억 수준이니, 매월 이자만 자그마치 1억 2천만 원에 이른다.


더구나, 건물이 준공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최소 1년, 그사이 임대수익은 0원이다. 들어오는 돈은 하나도 없는데, 나갈 돈은 태산이다. 확정된 매월 금융비용에, 건축사 사무실 용역비, 그리고, 생각하지 못했던 기타 비용도 상시 발생한다. 건물 신축공사 첫 삽을 뜬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애당초 예상했던 준공 시기는 점점 뒤로 밀리고, 주변 아파트 주민들의 각종 민원, 시청과 구청에서 요구하는 각종 사안을 해결하는 데도 시간과 돈은 계속 투입된다.

그사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금리 인상, 철근콘크리트 공사를 위한 원재료 가격의 가파른 인상, 현장 공사투입 인력들의 인건비 상승으로 인한 추가 비용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얼마 전에는, 공사 현장에서 인명 사고도 있을 뻔했다니, 하마터면, 사람 잃고, 돈 잃고, 신축 프로젝트는 무기한 연장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이즈음 되면, 자연스레 의문이 들게 마련이다. 그동안 벌어 놓은 돈도 많고, 이미 여러 개의 사업체도 잘 운영되고 있을지 언대, 일개 개인(기업)이 굳이 이렇게 위험천만한 대형 PF(Project Financing)를 진행할 필요가 있나 하는 것이다. 나이 예순을 넘어서까지 말이다.

사업과 투자에 옳고 그름은 없다. 비록, 투자가 실패로 이어진다 해도, 그게 잘못된 의사결정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 할 수는 없다. 어떤 사업도, 어떤 투자도, 위험을 감내하지 않고는 결과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성공이든, 실패든, 결과가 나온 후에 내리는 해석은 모두 사후적인 분석일 뿐이다. 분석가(Analyst)는 일억 연봉자는 될지언정, 부자가 될 수는 없다.

흔히, 부동산 임대사업이라고 하면, 돈 많은 전주가 땅집고, 헤엄치면서 손쉽게 돈 버는 일이라고 폄훼하기 쉽다. 하지만, 이 세상에 당연한 투자 수익이란 없다. 토지를 사는 과정에서도 사기를 당할 수도 있고, 토지용도변경에서 난관을 맞이할 가능성도 크다. 비싸게 산 토지인데, 건축 허가가 나지 않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시공사나 건축설계사 사무실과 문제가 생겨 공사가 중단되거나, 이견이 발생해 소송으로 이어지는 일도 많다. 요새는, 원자재 가격 인상을 핑계로, 건물 짓는 도중에 도급계약 증액 이슈 문제도 종종 발생하는 듯하다.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환갑을 맞이한 A, B 부부는 이번 프로젝트를 유보할 생각이 전혀 없다. 이미 예상한 문제들 외에 전혀 예측하지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동안 여러 슈퍼마켓, 부동산 신축 임대사업을 직접 경험해 보았기에, 기꺼이 위험을 감내할 준비가 된 셈이다.


남들 보기에는 쉽게 돈 번 것처럼 보여도, 결코 어느 것 하나 쉽게 얻어진 건 없다. 그들을 스쳐 간 많은 사람이, 자신들을 부러워하면서도, 내심으론 그저 운이 좋다고 치부해 버린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에게 절대 그렇지 않다면서, 일일이 그들의 고충과 난관, 그리고 해결책을 설명해 줄 수도 없는 일이다. 물론, 그럴 필요도 없다. 어차피 세상을 사는 방식, 위험을 감내할 용기는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부부가 운영하는 슈퍼마켓과 부동산 임대사업체의 매출액을 모두 합하면 연간 4백억 원에 이른다. 개인기업이 이 정도 매출액이면, 내야 할 세금만 해도 수십억 원은 된다. 게다가, 그들이 고용한 인원만 해도 100명, 최저임금으로만 쳐도 매월 3억 원이다. 여기에 매출 원가(상품매입 원가), 공과금, 임차료, 금융비용 등 각종 판매관리비까지 고려하면, 영업이익은 많아야 매출의 5% 내외 수준이다.


사업 구조를 분석하고 보면, 연매출액보다 뒤에 서술한 사업비용, 그리고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각종 사업 위험에 먼저 눈길이 가는 게 인지상정이다. 우리는, 가급적 위험을 줄이는 것이 생존에 유리함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은 위험 너머의 무엇을 본다. 보통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주저하거나, 포기한다. 그게 차이다. 꼭 혁신적인 기업가, 기술 기반의 벤처기업만 특별한 게 아니다. AI, 빅데이터, 블록체인, 전기차, 이차 전지, 바이오산업 스타트업체만 창조적 파괴(Creative Destruction)를 하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수천 세대 아파트 주민들이 주말마다 자가용을 끌고 5km를 달려 대기업 프랜차이즈 마트로 장을 보러 가는 일도 불편할 수 있다. 집에서 마켓컬리나 쿠팡으로 신선야채 새벽 배송을 요청하는 것도 못마땅할 수 있다. 먹을거리를 실제로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보고 선택하고 싶은 수요도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소비자들을 위해, A와 B는 아파트에서 산책할 만한 거리에 대형 슈퍼마켓을 열기로 한 것이다. 동네 오프라인 슈퍼마켓에 수백억 원을 투자하는 것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울퉁불퉁 제멋대로였던 아파트 옆 공터가 깨끗하게 정비되고, 그곳에 신선한 음식료품이 가득한 슈퍼마켓이 들어선다면, 게다가 걷기 좋은 산책로와 넓은 주차장까지 완비된다면, 지금은 공사 현장이 시끄럽다고 민원을 제기하던 사람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단골로 거듭날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건물에 병원과 약국, 커피숍, 코인 노래방과 골프 연습장까지 생겨나 생활 인프라가 한층 풍부해진다면, 동네 주민들은 자기네 아파트 시세 올라간다며,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무려 2백억 원을 들여 매입한 3천여 평의 토지 가액이 불과 1년 만에 50% 가까이 올랐다. 살 때만 해도, 미친 짓이라고,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꼭대기 금액이라며 경악을 금치 못하던 사람들이, 이 소식을 알면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땅을 산 후, 1년 동안 건축 허가를 받고, 토지 기반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치가 오른 것이다. 공식 감정평가서상 기재된 금액이 그러하니, 그렇게 오를 리 없다며 외면해 봐야 소용없다.

프로젝트는 아직 진행 중이다. 성급한 결론을 내릴 일은 아니지만, 앞으로 헤쳐 나갈 위험이 커 보이지는 않는다. 예순을 맞이한 부부는 이곳에서 마지막 불꽃을 피우리라 다짐 중이다. 기존 사업장을 하나둘 정리하고, 다른 마트에서 일을 배우고 있는 자녀들이 이곳으로 오게 된다면, 그들의 인생 프로젝트는 무사히 마무리될 수 있을 듯하다.

건물 지하에는 슈퍼마켓을 오픈해 자녀들에게 운영을 맡길 예정이다. 기존 마트 매각 대금과 본 신축 건물에 입주할 임차인들의 임차보증금으로 대출금을 최대한 상환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금융비용 부담감도 현저하게 낮아지니, 부부는 편안하게 은퇴할 수 있으리라.



인생도, 사업도 운(運)은 참 중요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은 많다. 자칫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 부부가 실력만으로 이 자리에 오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이, 남들은 쉬 감당하지 못하는, 아니 감당하려 하지 않는 위험을 기꺼이 감당한 데 따른 결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성패는 운에 달린 것이지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17세기 명말 청초 시대부터 내려오는 고사성어이니, 억울해도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그렇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운의 7할이 아닌, 노력의 3할이다. 노력은 시도, 실천, 실행을 의미한다. 지레 겁먹고 아무 시도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이 10할(100%)이다.

슈퍼리치 부부의 시작점은 50의 나이였다. 그전에 그들의 인생에 어떤 성공, 그리고 실패가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들이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슈퍼마켓을 처음 시도했다는 것, 환갑(還甲)의 나이에 새로운 투자를 감행(敢行)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처음엔 그들의 운이 부러웠으나, 이젠 그들의 과감한 실행력에 주목하게 된다.


퍼리치 부부도, 사실 불안감에 흔들리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본인들도, 이렇게까지 일이 커질지는 몰랐다며 너스레를 떤다. 다만, 되돌아갈 길이 없었을 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조금 더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온 것뿐이라 했다. 게다가, 그들은 운(運)도 좋았음을 담담하게 인정한다.

우리의 선택지는 다양하다. 경제적 성공을 원한다면, 실패할 위험을 기꺼이 떠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경제적 실패가 우려된다면, 어렵사리 마련한 가족의 보금자리를 담보로 사업자금 대출을 받거나, 성공한 투자자가 되겠다며 비트코인(B), 테슬라(T), 서울아파트(S)에 모든 에너지를 투입할 필요는 없다.


어떤 인생을 지향하던, 자신의 선택에 최선을 다하고, 다른 이의 성취를 기꺼이 인정하면 될 일이다. 다른 선택지를 지향하는 난, 그저 슈퍼-리치 부부의 인생 마지막 프로젝트가 무사히 성공하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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