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있는 곳까지_8.

by 김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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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있는 곳까지_8.


우린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럼, 기억하지…. 답을 하자 진혁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떨리는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때의 어린 진혁과 지금의 진혁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억한다고 한들 우린 이제 돌아갈 수 없어.”

“그래도 기억하고 있었네. 나는 네가 다 잊어버린 줄 알았지.”

“여기 오니까 엄청 사소한 것들까지도 다 기억이 나는걸. 난 그때 네가 어떤 모자를 쓰고 무슨 색 옷을 입었었는지 그런 것들까지도 다 기억해.”

‘그런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애석하게도 이 말만큼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목이 메었다. 추억은 때론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한다. 그때로 돌아가기에 우린 너무 많은 시간을 거슬러 왔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지쳐있었다. 이제 갈라서야 하는 수밖에는. 서로의 앞길을 응원하며 서로를 보내주어야 한다. 추억까지도 이젠 사치가 되어버렸으니. 우리가 다시 보성에 온다고 해도, 그 시절처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차 안에서부터 깨닫고 있었다. 사실 그 전부터도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회복할 수 없을지라도 보성에 온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겪은 일들이 잊어버릴 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한가지 소망뿐이었다. 물론 우리의 일이 그렇게 쉽사리 기억 속에서 잊힐 만한 것은 아니라고, 마음 한편에서 갈등이 일기도 했지만.

‘어렸던 그 시절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제발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애석하게도 보성 곳곳을 다니면 다닐수록 더욱 현실을 깨달아 가는 것 같았다. 여행이 끝난 후 서로 각자의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제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다. 우리의 관계도 청산하고 각자의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더라도, 우리의 흔적은 언제까지나 서로가 안고 가야 할 짐일지도 모른다. 그간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화장기 없는 눈을 손으로 가린 채 정신없이 울고 있으려니 진혁이 내 머리를 감싸 안아주었다. 그는 잠긴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만 내 귀에 대고 반복하고 있었다. 우악스럽게 눈물을 훔쳐냈지만 나는 이런 상황이 그저 새삼스럽기만 하다. 그를 밀치며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하자 그는 더욱 내 어깨와 머리를 그러안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뭐 하는 짓이야. 그만둬!”

뒤로 물러나며 소리치자 그는 맥 빠진 표정으로 힘을 풀었다. 흔들리는 그의 눈이야말로 곧 울 것 같이 보인다. 그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넌 이제껏 아무렇지도 않았어? 모든 것이 똑같잖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여기가 보성이 아니었어도,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갔어도 그건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네 눈엔 은서가 죽은 것밖에 안 보이지?”

그의 단단한 목소리는 오랜만에 듣는다. 더군다나 요즘 짧은 대화밖에 하지 않았던 나에겐 특히. 그가 내뿜는 에너지와 열기, 표정이 눈에 익숙한 것처럼 다가왔다. 이런 그의 얼굴을 내가 언제 어디서 보았을까? 다정하지만 어느 것에도 마다하지 않을, 강인함이 깃든 그의 목소리가 귓가와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쏟아지는 그의 말을 흘려보내며 나는 그의 이 표정을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는지 한참 생각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자 나는 마침내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지금 마주 보는 그의 이 표정은 그 시절 그가 모자 쓴 소년이었을 때, 내가 자주 봐왔던 표정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되묻는 말조차 나는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자 그는 다시 팔을 고쳐 나를 안았다.

“아직 같이 살 수 있어! 처음부터 다시 하면 돼. 우린 아직 그대로야. 너도 봤지? 이곳도 여전히 그대로인걸. 그러니까 다시 시작하자. 다시 한번 더 살아보자!”

그의 목소리가 나를 향해 쏟아지듯 달려들자 텅 빈 마음에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 같다. 그에게 기대어 있던 나는 비틀비틀 일어섰다. 어디선가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생 나랑 같이 살 거지? 이 노래처럼 도망가면 안 돼! 인애야 사랑해!”

이곳에서 처음 노래를 불러주고 난 뒤 그가 내게 들려준 고백이었다. 그때의 나 또한 이 고백을 그렇게 큰 의미를 담아 듣고 있지는 않았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만 가슴이 먹먹해지고 말았다. 아까보다 더 크게 울음을 터뜨리며 진혁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꽉 안아줄 뿐이었다. 누가 보면 남사스러울 정도로 우리는 그곳에서 한참 서로를 끌어안은 채 그렇게 서 있었다.

다음 날 보성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는 오전 10시에 있었다. 우린 찜질방 한번 이용해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수면실에서 뻗어버렸다. 아침에 가까스로 잠에서 깨어나 서둘러 짐을 정리해 나왔다. 택시를 타고 보성역에 도착해 겨우 시간을 맞춰 기차에 올랐다. 짐을 내려놓고 그와 나는 우리 곁을 지나는 관광객들을 구경하듯 바라본다. 이곳에서 녹차밭은 보이지 않았다.

진혁은 갑자기 나에게 이제 어떡할 거냐고 물었다. 어젯밤에 내가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쎄, 아직 서울 도착하기 전까지 시간 남았잖아. 좀 더 생각해보자.”

내가 창밖만 응시하며 심드렁하게 답하니 그는 이제 질렸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린 채 이내 잠들었다.



아직 우리에게 시간은 많지 않은가. 이제 나에겐 갈라서느냐 혹은 같이 사느냐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기회만 된다면 다음에 다시 한번 더 보성에 오고 싶단 생각뿐이었다. 이 사람과 함께 오던지, 아니면 나 혼자 오던지. 그것도 아니라면 진혁과 전혀 다른 곳으로 떠나도 좋을 것 같았다. 곳곳의 흔적을 지나칠 때마다 여전히 나는 감정에 압도당하지만, 보성에 도착했던 이 순간만큼 삶이 주는 시간에 흠뻑 빠져본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이제부터라면 보성이 아닌 전혀 다른 곳에서도 지금의 이 기분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아까부터 잡고 있던 진혁의 손을 내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또 얼마만큼 세월이 지나도, 먼 훗날 다시 보성에 와도 푸르게 반짝이는 잎들은 지금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날 맞이해줄 것이다. 나 역시 그들이 보기에도 여전히 같은 모습이겠지. 나도, 이 사람도 그리고 은서도. 반짝이는 푸른 빛 속에서 그의 노래는 다짐이 되었고, 우리에게 결실이 되어 찾아온 은서 역시 그 이름처럼 영원히 반짝이고 푸른 삶을 간직할 것이다. 그 빛은 언제까지나 남아있을 것이니 바람에 흔들리는 일이 있어도, 우리 가족은 또다시 이곳 보성에서 만나자. 끝없이 이어진 푸른 횡렬을 눈으로 밟으며 산을 오르다 보면 내려가는 길목 어디쯤에서 우린 반드시 같은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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