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타고 우린 그 찜질방에 도착했다. 처음엔 버스를 타고 가려 했지만, 이곳 교통은 그리 원활하지 않아 마을버스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얼마간 버스를 기다리다가 우리 옆을 지나는 택시를 잡아 그 찜질방을 아냐고 물어보니 기사는 방금도 그곳에 여자 손님 두 명을 내려주고 오는 길이라며 흔쾌히 타라고 했다. 택시 기사의 도움으로 우린 찜질방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 앞에 서니 지난 과거에 보았던 것처럼 외관은 변함없이 그대로인 듯 보였다. 과거로 다시 돌아온 느낌에 얼떨떨한 기분마저 느꼈다. 조심스레 입구로 들어서자 사장님은 우리를 친절하게 맞아주셨다. 내가 소년과 왔을 때처럼.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났기에 이곳 사장님의 얼굴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익숙하다. 이 친절만큼은.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벌써 시계가 7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사장님은 우리를 끝으로 손님을 더 이상 받지 않을 것이라며 돈을 주면 자장면을 시켜주겠노라고 했다. 시장해진 우리는 사장님께 자장면 2인분 어치의 현금을 내밀었다.
대충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자장면은 벌써 도착해 있었다. 사장님은 자장면을 주시면서 밤 12시 전엔 외출하고 돌아와도 된다고 일러주었다. 우린 TV가 틀어진 공동 수면실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자장면을 먹었다. 혹시나 자장면이 부족할지도 모르겠다며 사장님은 우리에게 밥 한 공기를 더 덜어주시기도 했다. 사장님의 친절에 죄송스러워하면서도 앞선 등산에 배가 많이 고팠던 우리는 마다하지 않고 밥 한 공기를 받았다. 그때도 그랬다. 그때의 소년과 나도 이 사장님이 시켜주신 자장면과 밥 한 공기를 나눠 먹은 기억이 있다.
진혁과 나는 자장면을 남김없이 먹어 치웠다. 남은 양념장까지 싹싹 밥에 비벼 먹어 깨끗해진 빈 그릇을 반납하고 그제야 배가 찬 우리는 공동 수면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수면실엔 손님이 열 명 남짓 들어차 있었다. 그들은 가족이거나 커플인 듯 제각각 벽에 기대어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선 경쾌한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공개오디션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교복을 입은 소녀가 심사위원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녀의 노랫소리만 빼면 찜질방 내부는 아주 조용했다.
진혁과 내 머리맡에 난 창문 위로 일그러진 하얀 달이 보였다. 파란 하늘에 감싸여 빛을 내는 그 주위로 별들이 우수수 반짝였다. 다행히 오늘 하늘은 무척이나 맑았다. 나는 넋이 나간 듯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진혁의 팔을 흔들어 좀 걷다 오자고 했다. 자장면이 소화가 안 되었던 건지 예전 같았으면 귀찮아했을 그는 알겠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5월의 밤바람은 아직 쌀쌀하다. 우리는 가운 위에 가디건만 한 장 달랑 걸친 채로 건물 앞마당을 걸었다. 역시 이곳에선 별이 잘 보였다. 서울과 달리 가로등 불빛이 많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공기가 맑기 때문이기도 했다. 넓지도 않은 마당을 몇 바퀴 빙 돌면서 우리는 오래도록 별을 구경했다. 다시 별을 보며 소년이 불러주었던 노래를 떠올렸다.
보성으로 오는 기차 안, 꿈속에서 들어본 소년의 노래. 소년은 나에게 곧잘 ‘그대 있는 곳까지’라는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가 그 노래를 내게 처음 불러준 장소는 바로 여기, 보성의 이 찜질방 앞마당에서였다. 소년과 나는 마치 지금처럼 창피한 줄도 모르고 찜질방 가운만을 입은 채 앞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영원히 사랑한다던 그 맹세. 잠 깨어 보니 사라졌네. 지난밤 나를 부르던 그대 목소리. 아 모두 꿈이었나 봐.’
나는 아까부터 마음속으로 계속 그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 가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다음 가사가 뭐였더라…. 가사를 떠올리려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갑자기 진혁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영원히 사랑한다던 그 맹세
잠 깨어 보니 사라졌네
지난밤 나를 부르던 그대 목소리
아 모두 꿈이었나 봐
그대가 멀리 떠나버린 후
이 마음 슬픔에 젖었네
언제나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아 바람아 너는 알겠지
바람아 이 마음을 전해다오
불어라 내 님이 계신 곳까지
다소 떨리는 목소리로 그는 노래의 끝을 맺었다. 가만히 그의 노래를 듣고 있던 나는 순간 시공간이 멈춘 것 같다. 그가 내게 물었다.
“이거 기억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