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분을 더 걸어서 드디어 바다전망대에 도착했다. 숨을 몰아쉬며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드넓은 초록색 녹차밭이 우리 시야 아래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를 바라보니 울창한 숲이 보였다. 숲 위로는 푸른 산 사이로 신기루 같은 바다가 아주 좁게 내다보였다. 우리 옆에서 걷던 어떤 앳된 커플이 바다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나는 산자락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보여지는 바다가 마음에 들었다. 저 바다야말로 우리에게 보여지는 현실이 아닐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다와 같은 것. 바다는 저 멀리 있어 푸른빛이 아니라 그냥 잔잔한 물색으로 평온해 보이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도 바다는 저 먼 곳에서 철썩 처얼썩- 파도 소리를 내고 있겠지….
진혁과 나는 벤치에 자리가 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주저앉았다.
“오길 잘했다. 가슴이 뻥 뚫리네. 시원하다!”
힘이 난다는 듯 울림 있는 목소리로 그가 크게 외쳤다. 나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고 있자니 뿌듯함으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도 다시 나를 보고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간 머무르던 병원을 떠나, 집을 떠나 다른 지역에 왔다는 것은 확실히 기분전환이 되었다. 산을 내려가기 전까지 우리는 하염없이 신기루 같은 바다만 내려다보았다.
그래, 우리 앞에도 신기루 같은 미래만 남았다. 그러나 애당초 현실과 미래와 행복이라는 것은 다 그렇지 않을까. 처음부터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람의 마음을 농간하는 것이었다면 실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이들이 이런 인생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라고 애써 생각했다. 바다전망대까지 왔으니 우리에겐 내려가는 일만 남아있었다.
바다전망대에서 내려가는 길은 올라오는 길의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산 중턱에선 조금 가파른 길이 펼쳐졌지만, 점점 아래로 내려가자 손을 잡고 내려가도 될 만큼 경사가 완만해졌다.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내려왔다. 바다전망대에서 내려가는 길목엔 울창한 소나무 숲이 길을 시원하게 밝혀주었다. 끝까지 내려오니 줄지어 반짝이는 잎의 횡렬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오르고 내려왔던 산을 다시 돌아본다. 사람들이 아까의 우리처럼 밧줄을 잡고 열심히 그리고 천천히 산을 오르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진혁과 나는 쉼터로 돌아오자마자 기념품 가게에 들러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가게엔 녹차로 만든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있을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이 가득했다. 녹차티백, 녹차로 만든 초콜릿, 녹차로 만든 과자…. 살만한 것이 있는지 물건을 들어 이리저리 꼼꼼히 둘러보았지만, 그다지 구미가 당기는 물건은 없었다. 진혁도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진작부터 뭘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난 예전에 이곳에서 먹었던 녹차 아이스크림 생각이 났다. 소년과 함께 맛보았던 녹차 맛 아이스크림. 나는 그에게 아이스크림이나 먹자고 말하며 그의 손을 이끌었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든 우리는 테라스에 앉아 아무런 대화 없이 아이스크림만 먹었다. 차고 씁쓸한 맛이 혀를 타고 녹아내렸다.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생각했다. 아까도 소년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던 기억이 자꾸만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그 시절만큼 나는 젊지도 풋풋하지도 싱그럽지도 않다. 초록빛의 싱그러운 잎이 이렇게 씁쓸한 맛을 내는 아이스크림으로 변해버렸다는 것은 어쩐지 사람의 인생과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린애 같은 생각이었다. 이젠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지…. 달콤하기보다 씁쓸하고도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나는 왠지 서글퍼졌다.
“인애야 이것 봐.”
진혁이 우리가 앉은 테이블의 옆 벽면을 가리켰다. 거기엔 명함 크기만 한 광고지가 테이프로 범벅이 되어 붙어있었다. 빨간 글씨로 ‘보성삼베황토참숯찜질방’이라고 쓰인 이름을 보며 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마땅히 머물 곳이 없는 보성에선 대부분 관광객이 저녁 기차를 타고 서둘러 돌아간다. 그것도 아니면 버스나 택시를 타고 근처 다른 역으로 가서 숙소나 모텔을 잡아야 한다. 그나마 보성의 한 군데 있는 여관도 밤이 되면 관광객들로 미어터져 잘못하면 퇴짜를 맞을 수 있다고 인터넷에서 후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진혁과 나 또한 저녁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깜짝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광고지 속의 찜질방이 예전 그 소년과 함께 머물던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보성으로 오기 전 이번에도 그 찜질방에서 머물 수 있을까 싶어 여러 번 검색해 보기도 했지만, 그 찜질방에 관해 최근 올라온 자료나 번호가 없어 이제 없어진 줄로만 알고 있었다. 지나가던 카페 직원을 불러 물어보니 그는 그 찜질방은 워낙 오래되고 시설도 별로라며 쐐기를 박아버렸다. 관광객들에게도 인기가 없는 곳이라고. 그는 그 찜질방은 올해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을 예정이며 아직 소수의 손님을 받고 운영하는 것 같으니 마음이 있으면 한번 가보라는 식으로 말하곤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직원의 말을 흥미롭게 듣던 진혁은 그 찜질방에 가서 머물자고 말했다.
“운영한다니 다행이네. 한 번 가보지 뭐. 아직 시간 이르니까. 가서 자리 없다고 하면 다시 역으로 돌아오면 되잖아?”
난 내심 기뻤다. 그리웠기 때문이다. 넓다 못해 황량한 느낌을 주는 찜질방 건물의 앞마당과 좁디좁은 여탕. 30개도 채 안 되는 락카들과 허름하여 금방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불가마와 공동 수면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 쏟아질 듯 맑은 별들과 그리운 소년의 노래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