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리, 텍사스>, 빔 벤더스
제목과 포스터만 보고 파리에서 만났다가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텍사스 사막을 유랑하는 어느 중년 아저씨의 로드무비인 줄 알았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처럼 파리의 여자와 텍사스 남자의 진부한 연애와 이별 이야기로 추측했는데, 막상 보니 그런 내용은 아니었다. 물론 상상했던 키워드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영화는 한 가족의 결별과 결합을 다룬다. 모종의 이유로 가족과 결별한 채 4년 동안 유랑했던 주인공 트래비스는 가족과 극적으로 재회한다. 병원에 실려와 이름을 묻는 의사의 말에도 입을 꾹 다문 채 언어를 잃었던 트래비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동생과 재회하며 말문을 연다. 그가 가출한 사이 동생의 집에서 지내고 있었던 자신의 아들 헌터와도 재회한다. 지난 세월이 만든 벽으로 인해 잠시 둘은 내외를 하지만, 점차 가까워진다. 그의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헌터는 트래비스에게 조금씩 마음을 연다. 친해진 둘은 그들을 떠났던 헌터의 엄마이자 트래비스의 아내를 찾으러 가는 작당모의를 계획한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만나지만, 완전한 결합을 이루지는 못한다.
영화는 가족의 정의와 사랑의 작동 방식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미움, 아들을 버린 아버지의 죄책감이 오가는 순간들이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핏줄이란 아주 성긴 인연의 끈으로 이어진다. 광속으로 우주를 오가는 우주선도 아니고, 사막을 가로지르는 자동차도 아니고, 그저 두 발로 나란히 걸으며, 끝내는 조수석과 운전석에 나란히 앉아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 위해 같은 목적지로 향한다. 보조를 맞추며 걷듯이 가족이란 울타리도 서로 마음의 온도를 서서히 맞춰가는 과정이란 걸 은유하듯이.
영화의 압권은 트래비스와 제인의 재회 장면이었다. 헌터를 위해 매달 돈을 보냈던 아내 제인은 환락가에서 일하고 있었고, 트래비스는 몰래 그녀가 일하는 곳에 가서 모른척하며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 서로를 보지 못한 채 수화기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참 애절했다. 결국 그녀가 그의 정체를 눈치챘지만, 둘은 끝내 영영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다. 서로를 보지 못하는 밀실이었지만, 서로의 슬픈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 등을 돌린 채 차분히 음성을 전하던 그들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신이었다. 그들은 그렁그렁한 눈망울과 함께 이제껏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며 진정한 결별을 끝내 택했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 사랑이라면, 대화를 통해 관계의 종결을 말하는 것도 이별이다. 언어를 잠시 잃었던 트래비스는 가족을 통해 언어를 회복하고, 회복한 언어를 작별을 그렇게 고한다. 누군가는 답답한 사랑과 이별의 과정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그들에게 최선일지도 모른다. 트래비스의 이기적인 선택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냥 가로등 아래에 쓸쓸히 서 있던 트래비스를 응원하고 싶었다.
영화에서 나오는 파리와 텍사스는 각기 다른 나라의 도시가 아니었다. 텍사스 주의 파리였다. 그곳은 트래비스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가족과 함께 살려고 샀던 땅이 있던 도시였다. 하지만 결국 그 땅에는 아무도 갈 수 없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 텍사스 주 아래에 있는 파리처럼 트래비스란 사람 아래에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일 수 있었지만 끝내 실패했다. 그들은 프랑스의 파리, 미국의 텍사스처럼 각기 다른 나라를 향해 갔다.
미국의 파리는 프랑스의 파리란 이름을 빌려왔을 뿐, 진짜 파리가 될 수는 없다. 트래비스도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이처럼 느낀 것이 아닐까. 아버지란 이름을 가졌지만, 아버지란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비겁한 변명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점에서 가족과 관계의 무게를 가장 솔직하게 풀어낸 영화였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다시 한번 재개봉한다면 영화관에서 꼭 보고 싶은 영화다. 감독님이 요새 말 한번 잘못해서 많이 혼나고 있지만, 그래도 부디 이런 영화를 또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미스터 빔 보고 있나요?
Thanks to Chanel, Wim Wend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