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세우지 않기
빳빳한 종이가 가지런히 묶여 괜히 기분 좋은 새 것의 냄새를 풍기는 다이어리. 설레는 마음으로 표지를 펼쳐 왼쪽 귀퉁이 자그마한 칸에 숫자 1을 써넣고 1부터 31까지 순서대로 적어 완성하는 달력. 새해의 첫 날부터 무엇을 할지 알록달록 최대한 다양한 색깔의 펜을 돌려 잡아가며 빼곡하게 채워나가다 보면 이미 알찬 한 달을 보낸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재미. 종이를 한 뭉텅이 뒤로 넘겨 줄이 그어진 쪽이 나오면 큼직하게 올해의 연도를 적고, 단호하게 적어내는
올해의 목표
오래 전 나는 매년 연말연시가 되면 이런 일을 하곤 했다. 단정하면서도 펼치기 쉽게 만들어진 다이어리를 구하고, 1월 1일부터 최대한 많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분주히 적어 내려가고는 했다. 중, 고등학생 때부터 꽤나 오랫동안 이러한 일을 했었는데, 대부분은 작심삼일에 그치는 해도 많았지만 가장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 20대 몇 년 간은 제법 많은 새해 목표를 달성하기도 했다. 그런 해에는 다소 너덜너덜해지고 하얀 종이가 까만 글씨로 가득 찬 다이어리를 보며 혼자만의 뿌듯한 연말을 보내기도 했다. 1월부터 12월까지 큰 기복 없이 기록이 많이 남았다는 건, 최소한 1년 동안 꾸준히 내가 열심히 살아왔다는 아날로그적인 증거이기도 했다.
10년 넘게 해오던 루틴을 버린지도 벌써 몇 년째인지 모르겠다. '한 해만 쉴까?'하던 생각은 어느 덧 새해에 아무것도 안 하는 루틴으로 바뀌어 고착되었다. 하던 일을 하지 않게 된 이유는 명확했다. 나의 시간이 내 뜻대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핑계라면 핑계일 것이다. 위인은 역경 속에서 피어난 꽃과 같은 것이라 하니,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기에는 그른 듯하다. 한 때는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살면서 큰 일 한 번은 해낼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그럴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고, 의지와 실행력도 가지고 있다고. 누군가에 비하면 하찮기 짝이 없어서 명함도 못내밀 정도의 일이었지만, 꾸준한 성실함과 계획성으로 스스로 세운 계획을 차근차근 달성하며 쌓은 자존감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경험으로 일군 자그마한 성공탑은 더 큰 계획과 실행으로 옮기기 이전에 조용히 무너졌다.
그러는 사이 서서히 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은 사라져 갔고, 가지고 싶은 것들 목록만 남게 되었다. 이를 테면 집이라든가, 집이라든가, 집이라든가. 작고 오래된 집을 대출로 메꿔 갖고 나니 더 큰 집, 더 좋은 위치의 집 정도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지만 알고는 있다. 이건 내가 원하는 삶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욕심이라는 것. 누군가는 이렇게도 말한다. 갖고 싶은 게 있으니까 열심히 살아갈 원동력이 된다고. 하지만 애써 눈감아버리고 싶은 사실도 알고 있다. 열심히 살아간다고 뭐든 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니, 오히려 되는 게 거의 없다. 매일 아침 눈을 떠서 크게 아픈 곳 없이 밥을 먹고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 또한 훌륭한 '성공'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 있겠다. 중요한 건 적어도 나에게 그것이 훌륭한 성공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다이어리를 적었고, 많은 노력을 했고, 많은 시간을 들였고, 많은 노동도 들였다.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진 못했다. 실패가 다가왔을 때 주로 내 탓을 했었다.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계획이 엉성했다', '잠을 더 줄였어야지 멍청이!', '이것도 못해내면 앞으로 계속 루저의 인생만 있을 뿐이다, 정신차려'.
많은 시간 동안 나에게 가혹하게 대했다. 나의 나약한 정신력을 탓하며 계획이 어그러진 것도 내 탓, 100년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한 자연재해도 내 탓, 우울한 것도 내 탓, 태어난 것도 내 탓...그렇게 또 수 년 간 화살을 자신에게 돌리다가 그 또한 부질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탓한다고 실패가 성공이 되는 것도 아니었고, 내가 더 노력한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도 아니었다. 삶을 살아가는 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도 필요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나에게 늘 없던 그것. 그것 또한 나의 노력으로 메꿀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일말의 희망을 남몰래 품고 있기는 하지만, 해가 지날 수록 그 희망의 불씨 마저 사라지고 있기는 하다.
이게 내가 더 이상 거창한 새해 다짐을 하지 않게 된 이유이다. 그래도 새해니까 한 번 더 희망을 품어보자면...올해는 더 나아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