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오래 살더라."
민망한 이야기였다. 직접적으로 죽고 싶다고 말한 건 아니었지만, 인생의 즐거움을 알아도 영면할 수밖에 없었던 존재 앞에 서서 "나 대신 더 살지"라고 말했을 때 옆에 선 언니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정말이지 반박불가의 한 문장이었다. 삶에 미련이 없냐고 묻는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바랐지만 이루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미련은 이제 없긴 하다. 남아있는 건 미련이라기보다는 책임감일 것이다. 내가 남겨놓은 일들, 아직 어린 자식이랄지 강아지들이랄지. 당장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무척이나 힘든 하루하루가 될 것이 분명한 존재들. 물론 그들이 당장 길거리에 나앉게 될 상황은 아니고, 결국에는 다른 가족들의 도움으로 생활을 회복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을 위해서라도 살아 있어야 한다는 건 수면 아래의 물살 같은 내 무의식적 삶의 의지일지도 모르겠다.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 행복했다, 나름대로 즐거운 인생이었다는 기분도 모르고 죽으면 억울할 것 같다고. 억울해서 편하게 가지도 못할 것 같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걸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깨닫고 올 시간이 부여되기에 더 오래 살다 가는 걸 수도 있다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래서 자신은 팍팍한 생계 속에서도 나를 위한 맛있는 커피 한 잔을 가끔은 사고, 보고 싶은 영화 보러 영화관도 다니고, 훌쩍 드라이브도 다녀오며, 경치가 좋은 곳에 주차하고 차에서 잠시 감상이라도 한다고 말이다. 그렇게 환기를 시키고 집에 들어가면 가족들에게 싫은 소리도 덜하고 숨통이 트이더라고 말이다. 세상에 당연한 일은 없기에 자신이 밥을 차리는 것, 일을 하는 것, 하물며 더 자고 싶은 걸 참고 제시간에 일어나는 것 또한 잘하는 일이며 그런 것들을 차곡차곡 쌓았다가 적절히 보상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생활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커피 한 잔 사 마시는 것이 보상이 되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잔고가 넉넉해서 언제든 원하면 사 먹을 수 있는 건 보상이 아닐 거라고. 지혜로운 말이었다. 실제로 월급이 좋았을 때에는 언제든 커피를 사 마실 수 있었다. 물론 절약이 몸에 배었기에 평일에는 2000원짜리 커피도 할인쿠폰이 있을 때라던가 주 2회 정도로 스스로 제약을 걸었지만, 주말에는 아이와 신상 카페를 가는 것이 루틴이었을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그때도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라기보다 '이 정도 버니까 이 정도 사치는 괜찮겠지'라는 단순한 소비의 기준이었다. 나는 제대로 보상하는 법을 모른다. 열심히 일하고 난 뒤에도 쉬면 불편함을 느끼고, 그럴듯한 결과가 없으면 뭔가를 했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그게 나를 힘들게 하는 원인 중 하나라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고쳐지지가 않는다. 아무래도 '뭘 대단한 거 했다고 보상을 해? 보상을 바라기엔 아직 멀었지' 병인 것 같다. 원하는 만큼 결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거의 대부분은 여기에 속한다) 자기혐오와 우울증에 빠지는 쾌속열차이다. 이 열차를 타고 있다면 결코 인생은 행복한 일도 있고, 어려움도 있지만 나름대로 즐거운 것도 있다는 생각을 얻지 못한다. 창 밖의 모든 것들은 너무 빨리 지나가버려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도 없고, 멀리 보이는 풍경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 손에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어제는 충격적인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평소에 나는 지하주차장에 주차하는 편인데, 어제는 금방 다시 이동해야 할 일정이 있었기에 지상에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마저도 데려던 공간은 만차였기에 단지 뒤편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대었다. 집에 올라가 학원을 마치고 돌아온 아이와 함께 강아지들의 오후 배변산책을 간단하게 다녀온 후 부모님 댁에 가기 위해 아이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엄마, 저기 좀 봐. 고양이야. 귀엽다."
멀쑥한 길고양이가 우리 차 뒤쪽 화단에 엎드려있었다. 아이는 고양이가 식빵을 굽고 있다며 참 귀여워했다. 우리와 눈을 맞추고 곧장 도망치지는 않았지만 사람 손을 딱히 타는 고양이도 아니었기에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차에 탔다. 시동을 켜고 안전벨트를 매고, 기어를 주행으로 바꾸고 발을 떼려다가 다시 기어를 주차모드로 바꾸었다. 눈앞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바닥을 나뒹굴며 펄쩍펄쩍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어딘가 분명 크게 다친듯한 고양이는 주차장의 아스팔트 바닥을 물에서 건져낸 물고기처럼 튀어 올랐다. 자신의 머리가 몇 번이고 바닥에 찍히는 줄도 아마 모르는 듯했다. 머릿속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에 연락을 해야 할지, 119에 연락하면 와 주시는지 당황하고 있었는데, 생각이 미처 정리되기도 전에 고양이는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색깔이 비슷한 다른 고양이가 천천히 바닥에 누운 고양이 곁에 다가가서 잠시 앉아 지켜보았다. 나는 일단 아이에게 보지 말라고 얘기하고, 차에서 내려 경비실로 갔다. 다행히도 우리 집 강아지들을 가장 예뻐해 주시던 경비 아저씨께서 근무 중이셨고, 고양이가 사고를 당한 것 같다는 말에 한달음에 주차장으로 같이 와주셨다. 아저씨도 적잖이 당황한 기색이셨다. 나는 쓰러진 고양이를 자세히 바라보지 못했지만 흘끗 보아도 얼굴과 머리를 크게 다친 건 분명했다. 고양이는 눈을 감지 못한 채로 이미 가버렸다. 경비 아저씨께서 분주하게 정리를 해주셨고, 나와 아이는 일정대로 부모님 댁으로 출발했다. 친정 집 대문 앞에서 아이를 먼저 집에 들여보낸 후 혼자 차에서 블랙박스를 확인해 보았는데, 내가 경비실에 가기 직전 지나갔다던 택시와 부딪힌 것이 맞았다. 택시는 사고를 감지했을지 안 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출차했다.
불과 30여 초 만에 살아있던 고양이가 고양이 별로 가버리는 순간이었다. 그 고양이의 마지막 순간이 얼마나 거대한 공포와 고통이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보았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했다. 친구 혹은 가족이었을 다른 고양이가 그 곁에 앉아있다가 경비 아저씨가 정리를 하는 동안 다른 트럭 밑으로 자리를 옮겨 바라보고 있던 것도 먹먹했다. 소중한 가족을 떠나보내는 슬픔을 알고 있기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남은 고양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언니 말을 빌려 생각해 보자면 고양이는 삶이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아파트 분리수거장 천막을 지붕 삼아 자신과 똑 닮은 가족과 함께 울고 웃으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러워진 걸 본 적이 없는 사료 그릇에 어떤 이가 성실하게 담아주는 밥을 듬뿍 먹으며, 해가 좋은 날은 돌담이나 화단에 누워 식빵을 굽다가 심심해지면 그림자 잡기 놀이를 하다가 졸리면 박스 더미로 숨어 들어가 가족들과 서로 온기를 나누며 잠드는 생활에서 행복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평안하고 행복한 삶의 끝이 그 작은 몸집으로 감당하기 힘들 갑작스럽고 큰 고통으로 찾아왔다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부분이지만, 부디 고양이 별을 다스리는 자가 '너는 생의 행복을 깨달았구나. 이제 고양이 별로 불러줄 테니 이곳에 와서 더 큰 행복을 누려라.'라고 부른 것이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