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가장 따뜻한 자리

첫 번째 친구를 소개합니다.

by 세렌뽕구


네이버 웹툰 '신의 탑'은 동굴 속에서 혼자 살던 주인공 ‘스물다섯 번째 밤’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 친구 라헬을 찾아 시험의 탑에 오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를 알게 된 사람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를 보내며 묻는다.


"밤. 그녀는 예쁘지도 착하지도 않아.

심지어 네가 싫대잖아. 대체 왜 따라가려는 거야?"


하지만 나는 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깜깜한 곳에서 홀로 지내던 그에게 그녀는 세상과 연결된 통로였을 것이고 그가 알게 된 바깥세상은 모두 친구 라헬로부터 채워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헸다.


나에게도 라헬과 같은 친구가 있었다.

싼도르. 그의 이름이다.




그는 나의 첫 현지 스페인어 선생님이었다. 처음 페루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한 달 동안 리마의 학원에서 언어와 문화를 배우며 적응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든 수업은 현지인들의 스페인어로 진행되었고 역사, 문법, 회화 그리고 독해 수업으로 과목에 따라 가르치는 사람들이 달랐다.


싼도르는 문법 담당이었다. 외국인의 서툰 스페인어에 관대했던 다른 강사들과 달리 그는 나를 매우 답답해했다.


“뽕구! 단어 나열하지 말고 정확히 문장으로 말해. “


어순이나 문법을 틀리면 정확하게 맞을 때까지 반복해서 말하도록 시켰다. 어찌나 엄격하던지 회화 선생님도 안 그러는걸 문법 담당자가 유난이라며 불만을 가지는 학생들도 있었다.




어쨌든 한 달은 금방 지나갔다. 함께 왔던 한국인들은 최종 목적지로 떠났고 나는 리마에 홀로 남으니 외로웠다. 할 줄 아는 말도 별로 없는 데다 다른 사람들의 말까지 알아듣지 못해 자꾸만 주눅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득 싼도르가 떠올랐다. 학원 근처에 거주한다고 했던 그의 말이 생각나 용기를 내서 문자를 보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매주 미라플로레스 공원의 한 벤츠에 앉아 수다를 떨다 헤어지곤 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은 그가 리마의 명문대생이라는 것이었다. 문학을 전공하며 파트타임으로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고 그도 내가 첫 번째 학생이라고 했다.




‘아하, 문학도였군.‘ 그래서인지 그는 감정이 풍부했다. 늘 누군가를 사랑했고 상대방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다며 내게 하소연을 하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혹은 종종 내가 이해하지 못한 깊은 슬픔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내 언어를 향한 그의 엄격한 잣대는 변하지 않았다. 물론 때론 나를 귀찮아했지만 보통은 참을성을 갖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줬다. 그리고 꼭 내가 완전하고 분명하게 말할 때까지 교정해 줬다.


점점 내 귀가 트이기 시작하자 내게 페루의 역사,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좀 더 친해진 다음에는 그의 친구들을 소개받아 다 같이 참 많이 놀러 다녔다.




“뽕구, 너에게 페루란 어떤 의미니?”


나의 생일 축하 파티를 위해 그의 친구들과 밥을 먹던 중 에두라는 친구가 갑작스럽게 물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나에게 페루는 싼도르야.
내가 구사하는 모든 건 그에게서 왔거든.


진심이었다. 나의 대답에 다들 ”와우“하며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고 싼도르는 참 고맙고 아름다운 말이라며 울컥해했다. 페루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현지 친구들도 많이 생겼지만 관계의 시작은 그 친구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비속어는 알아도 절대 쓰지 않았고, 어려운 말보다는 짧고 직관적인 단어를 선택했다. 혹시나 말을 틀렸을 땐 또박또박 다시 고쳐서 하는 습관까지 모두 그가 가르쳐준 것이었다.


이성의 감정이 아닌 선생님이자 친구로서, 내게 새로운 세상인 페루와 언어의 세계를 열어준 선생님 싼도르. 그는 내게 사람 사이에 아무 조건 없는 친절함과 우정도 있다는 걸 알려준 이였다.



“명심해 뽕구. 열심히 정말 열심히 해야 해.

기억해. 너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리고 똑바로 말하는 연습을 계속 하자.“


늘 독려의 말을 건네었던 친구,


부족한 내 스페인어를 지도하는 게 기쁘다며

기꺼이 바쁜 시간을 쪼개줬던 친구.


페루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친구.

싼도르. 덕분에 말이 많이 늘었어.


페루에서의 모든 것에 대해 그에게 참 고맙다.


싼도르와 에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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