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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보구 Feb 14. 2024

어머니의 비광

(나는 의류업을 합니다)

 명절이면 아버지 산소에서 차례 지내는 걸 중히 여기는 어머니는 늦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그것이 어제였다. 어제 내려와 음식을 장만한 형수와 형은 어머니를 모시고 산소로 오고, 순천에서 출발한 우리 내외가 산소로 직행해 차례를 지내면 되는 연례행사의 하나지만 당일 날 아침이면 바쁘다. 그건 순전히 동작이 느린 내 탓이다. 더구나 운전도 느긋하게 사위를 살피며 하니 동행하는 아내는 속이 터지는 모양이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지긋이 재촉하면 그때야 정신이 바짝 들어서 민완해진다. 이번 차례는 큰형 내외와 어머니 그리고 우리 내외까지 다섯으로 단출하게 치렀다. 오 남매가 모두 참석할 때도 있었지만 해가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든다.


 세배를 하고 나면 어머니는 우리에게 세뱃돈을 주신다. 형은 칠십이 넘어서 세뱃돈 받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을 거라며 유쾌하게 웃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형과 형수가 가고 나자 어머니와 우리 내외만 남았다. 어머니는 어디서 났는지 비닐도 벗기지 않은 종이 퍼즐을 꺼내 놨다. 화투짝 비광이 그려진 퍼즐이었다. 수양버들아래 빨간 도포차림의 남자가 파란 우산을 들고 개울가에 서있고, 노란 개구리 한 마리가 버드나무에 오르려고 펄쩍 뛰고 있는 A4보다 큰 비광그림 퍼즐이었다. 어머니는 복지관에서 치매 예방차원에서 퍼즐 맞추기를 종종 하시는데 다른 사람들 보다 잘 맞추는 걸 은근히 내비치면서 비스킷 같은 퍼즐을 바닥에 쏟았다. 퍼즐조각을 들고 판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홀로 남은 어머니의 일상이 궁금해 연락을 안 하고 집에 들른 적이 있다. 현관문을 열자 안 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서 손님이 찾아온 줄 알았는데 거실에는 어머니 혼자 계셨다. 고개를 숙이고 화투 패를 뒤집으며 혼잣말에 열중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화투 점을 보면서 화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두 분이서 나누는 대화로 간혹 불안감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 대화는 오손도손할 때도 있지만 퉁명스럽게 티격태격할 때도 많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 순간 말투가 거칠어지면서 다투는 게 아닐까 싶은데 아무렇지 않게 굳은살 박인 손으로 다독이듯 다음 대화로 넘어간다. 그럴 때면 오래된 두 개의 톱니바퀴가 소리를 내듯 삐끗거리며 돌아가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퍼즐을 다 맞췄다고 나에게 자랑을 했다.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났더니 졸린다고 이불을 가져와 거실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어머니가 퍼즐로 맞춘 비광 도인은 파란 우산을 거꾸로 쓰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머니 옆에 누워있었다. 어느 틈에 잠이 들었는지 쌔근거리는 어머니 숨소리가 들렸다. 늙은 어머니 옆에 누워 있으니 어린 시절 엄마품에서 잠들던 생각이 났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편안해져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잠깐 낮잠을 자서 그런지 머리가 맑아졌다. 우리는 드라이브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아파트 화단에는 겨울 상사화가 맥문동처럼 파랗다. 동백나무도 호랑가시나무도 파란 잎을 겨울 햇살에 반사기키며 반짝거린다. 팔영산 뒤편에 있는 편백나무 숲에 가본 적이 있다고 어머니가 말했다. 먼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진 길을 따라 오르자 넓은 저수지가 나타난다. 물길 건너편으로 보이는 바위가 군데군데 섞여있는 겨울산이 제법 운치가 있다. 상록 활엽수에 싹이 돋는 봄이 오면 오묘한 색상이 저수지에 비출 것 같다. 편백나무 숲에는 우리처럼 휴일의 여유를 즐기는 가족들이 몇 팀 보였다. 어머니는 이동할 때 체크무늬 보행 보조기를 밀고 다닌다. 허리가 불편해서 몸을 곧추세우기 힘들지만 보행 보조기에 의지하면 곧잘 다니신다. 오르막이 심해서 조금 힘이 드는지 `장수길`이라고 이름 붙여진 숲길의 중간쯤에서 내려가자고 하신다. 우리는 그늘진 편백나무 밑에서 파랗게 빛나던 광나무를 뒤로하고 내려왔다. 봄이 오면 다시 오자는 말을 하면서 개나리 울타리와 남천이 빨간 열매를 쏟아내는 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길눈이 밝아서 지명을 잘 기억한다. 남열리 해수욕장이 있는 곳으로 차를 몰고 가자 곧이어 나올 동네 이름을 미리 일러준다. 언제 와봤냐고 물어보니 버스를 타고 왔다고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겨진 어머니는 집에 있기가 두려워 버스를 탔다고 했다. 무작정 탄 마을버스가 남열리까지 데려다줬다고 했다. 강냉이 한 봉지를 사고 운전석 뒷자리에 앉았는데 남열리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모두 내리더란다. 어머니가 안 내리자 운전사가 왜 안 내리냐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하더란다. 그래서 자기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강냉이 좀 드실 거냐고 물었더니 안 먹는다고 하더란다. 그 뒤로 몇 차례 버스를 타고 다녔다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아내는 한숨을 쉬고 운전하는 나를 바라보았다.

 홀로 남겨진 시간을 견디기 위해 어머니는 여행을 하셨던 거다. 소리를 내며 돌던 톱니바퀴 한 짝이 빠져버리자 슬픔을 잊기 위해 화투를 치신 거였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드라이브를 하기 전까지는 어머니의 외로움을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갑자기 햇살이 눈을 찔렀다. 팔영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다. 그 햇살에 눈가의 물기가 반짝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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