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 속에 외침

넌 참 사랑받고 자라는 아이구나

by 미현

자는 초등학교 5학년을 둔 엄마다.

아들 녀석의 연필을 깎아 필통 가득히 넣어 주면 기분이 좋다. 예전엔 칼날 길이가 조절되는 칼로 깎았는데 작은 검은색 수동 연필 깎기가 성능이 좋다.

칼이든 연필 깎기든 연필을 대할 때마다 가끔은 예전으로 돌아가 있다.


지우개 달린 연필의 사랑


어린 시절 밤마다 들려오던 그 소리는 도대체 무슨 소리였을까? 사각사각. 매일 밤 내 방에 들어오셔서 이 소리를 내시고 가셨던 어머니. 깎아진 지우개 달린 연필을 필통 가득히 넣어 주셨다. 아침이면 내 필통에는 잘 깎아진 지우개 달린 연필이 들어 있었고, 신기해하고 있는 내게 어머니는 다만 이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주셨다. ...중략

세월이 가고 내가 커서 엄마가 되면 내 아이들이 잠든 시간을 택해 내 어머니가 하셨던 것처럼 지우개 달린 연필을 소리 내며 깎아 놓으리라. 그리고 아침이면 이 세상에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어 주리라.

자는 이런 내용의 글로 백일장에 글을 써 입상이 된다. 입상이 어떻게든 되고 싶었는지 아님 따뜻한 글이 쓰고 싶었는지. 입상이 되어 책 한쪽을 장식하고 싶은 마음보다 넌 참 사랑받고 자라는 아이구나 누군가 부러워해 주길 바랬는지.

글의 주인공 엄마는 가상의 인물이다. 연필을 깎아 준 기억도 없으며, 매번 학용품을 제대로 갖고 가지 못해 학교 생활 내내 서럽게 했던 엄마에 대해 쓰고 싶지 않았다.


여덜살 첫 운동회. 꼭두각시 춤을 추는 애들을 보며 웃고 있는 자를 나는 서늘하게 느끼고 있다. 왜 나는 여기 이렇게 혼자 앉아 있는 것인지. 저 알록이들의 무희들을 바라보는 건 내가 아니라 그들이라는 것을 느꼈다. 모든 따뜻하고 훈훈한 풍경과 사람들이 일시 정지된 이상한 느낌을 뭐가 표현해야 할까. 이미 너무 오래되어 누구도 기억 못 하는 작은 이야기. 그럼에도 가슴속 커다란 검은 점 되어 버린 그날의 일을 누구에게 들어야 할까. 얼굴에 연지곤지 찍고 알록달록 색동옷 입고 해맑게 웃는 저 속에 나는 왜 끼지 못했는지를 말이다.

푸르디푸른 가을 운동회 속에 누구도 봐주지 않는, 삐죽 마른 미운 오리 새끼 독기 오른 계집애. 뜨거운 태양 아래서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까지 줄넘기를 한다.

다 이기고 말 거야.

구멍 난 심장은 버텨주지 못한다. 한 명 남은 애를 이기지 못하고 바람이 빠지듯 푹 사그라지는 작은 몸은 주저앉는다. 숨이 쉬어지지 않다가 울음과 함께 숨이 터져 나온다. 상으로 받은 쇠덩이 메달을 목에 메고 흔들흔들. 메달 때문인지 상처 받은 마음 때문인지 기분이 좋지 않다.


자는 부모의 모진 세월 풍파 속에 하루하루 고단한 삶 속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 때론 혼자 인양 자의든 타의든 덩그러니 내던져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군중 속에 무표정으로 서있는 내가 나를 바라보는 순간 가끔은 눈물 대신 어이없이 웃음이 났다.

먹고사는데 매달려 어떤 신경도 써 줄 수 없고, 특히나 아픈 자의 숨소리를 들어 보지 않는 부모가 참으로 밉다 못해 원망스러웠다.


몇 해 전 녀석의 소운동회. 학교에서 준 반팔티를 학년별로 색을 맞춰 알록달록 아이들이 입고 서있다. 그 무리 중 더운 차림에 낯선 복장으로 서 있는 아이가 있다.

저 애 엄마 누구야

운동회 하는지도 몰랐나 봐

저건 좀 아니지

아우 안쓰럽네

아이에게 무자비하게 돌을 던진다. 내가 맞고 있는 듯 아프다.

학교가 코 앞인 누군가 잽싸게 집에서 가지고 온 옷을 아이를 데고 가 입힌다. 그나마 다행인가.

마음이 스산하다 못해 춥다. 더운 날씨 속 한기라니.

금새 그아이로 빙의라도 된듯 멍한 눈이 된다.

나를 둘러싸고 서서 입에 하얀 거품을 만들며 공중으로 뿜어져 나오는 신기한 풍경에 웃음이 난다.


아무 일 없었던 것일까

아이는 색바랜 초록색 옷을 입고 잘도 웃는다.


아이야

오늘 일은 아무 일도 아니란다

부디 상처 받지 말고 자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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