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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돌 Sep 24. 2024

말을 예쁘게 하는 아이

너는 누구를 닮았길래 그럴 수 있는지

 아이는 파스타를 좋아한다. 쌀밥과 반찬을 먹을 땐 매번 남기는 녀석이 파스타집에 가면 접시를 싹싹 비워가며 잘 먹는다. 토마토 파스타, 크림 파스타, 오일 파스타까지. 종류도 가리지 않는다.


 파스타뿐이랴. 이런 데서 으레 같이 팔기 마련인 피자와 뇨끼와 리소토도 좋아한다. 샐러드는 풀떼기라며 싫어하지만 안에 토마토가 들어있으면 꼭 자기한테 달라 한다. 치아바타 빵을 발사믹 소스에 찍어먹는 것도 즐긴다. 심지어 밥반찬으로 올리브도 즐겨 먹는 아이다.


 "요 녀석 보게, 이탈리아에 가서도 살 수 있겠는데."


 아내도 나도, 파스타 소스를 입에 묻혀가며 정신없이 먹는 아이 모습을 바라보며 신기해한다.


 상상해 본다. 아이가 한국을 떠나 이탈리아에서 이방인의 삶을 살게 되면 어떨까.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꼭 한국에서 살아야 하는 시대는 아니니까. 이런 식성이라면 음식은 무난하게 적응할 듯하고, 일이야 제가 좋아하는 걸 찾아서 떠났다면 어련히 잘할 테고, 연애나 인간관계는 어떠려나. 아이라면 걱정 없겠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모르지만 다정다감한 성격이니까. 애정 표현을 잘하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남자들 사이에서도 꿀리지 않을 거라 본다.


 인터넷에서 읽었던 글인가. 어느 여자분이 여행 중에 힘들어서 길가에 앉아 울고 있는데 지나가던 이태리 꼬마 녀석이 그랬단다. "세뇨리따, 왜 바닥에 슬픈 보석을 흘리고 있나요?"라고. 그 동네 남자들은 꼬마아이 때부터 싹수가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였다. 우리 아이도 만만치 않다. 아빠나 엄마와는 다르게 표현을 곧잘 한다. 만 3살,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랬다. 다닌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인가. 아이가 입을 헤벌쭉거리며 말했다. "나는 ㅇ이가 좋아." 이유를 물었더니 눈이 예뻐서라고 답했다. 최근에는 애정의 대상이 바뀌었다. 저녁식사 중이었는데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단다. 어떤 생각이냐 물었더니, "갑자기 ㅎ 생각이 났어. 제일 소중한 친구야."라고 말했다.


 "그럼 ㅎ이도 지금 너 생각할까?"


 물었더니 아이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ㅈ 생각할 것 같은데."


 아니, 잠깐, 뭐라고. 정리해 보자면 아이가 처음에 좋아했던 여자아이 ㅇ은 여전히 우리 아이를 좋아하고, 우리 아이는 이제는 여자아이 ㅎ을 좋아하고, ㅎ은 남자아이 ㅈ을 좋아하는 것이렷다. 그럼 ㅈ은 누구를 좋아하는 거지. 머리가 지끈거려지는 복잡한 사각관계였다. 다섯 살 꼬마아이들이 벌써부터 <나는 솔로>며 <사랑과 전쟁>을 찍고 있다.


 여하튼. 아이는 종종 엄마를 빤히 쳐다보며 오늘 입은 옷이 예쁘네, 미용실에 다녀온 엄마를 보며 머리가 예뻐졌네, 어린이집 하원하면서 우리 엄마가 다른 엄마들보다 훨씬 예뻐, 같은 말을 한다. 가만히 놀다가도 갑자기 외친다. "아빠, 엄마, 사랑해." 시도 때도 없이 안아줘, 라며 우리에게 달려든다. 누군가 새 옷을 입었거나 반지나 목걸이를 하면 금방 알아보고 아는 체를 하며 칭찬을 한다.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사랑 에너지라는 게 있으면 이게 넘쳐흐를 만큼 많아서 어떻게든 나눠주지 않으면 못 배긴다.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기분 좋아지게 한다. 이런 게 바로 현실 경제에서는 실현된 바 없는 소위 '낙수 효과' 같은 건가.


 어쩔 수 없는 경상도 출신 남자인 나는 이런 아이가 적이 낯설다. 쟤가 나의 아이가 맞나, 하며 서름서름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어떻게 저런 간지럽디 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 점 부끄러워하는 표정 없이, 하나 지치지도 않고,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아내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가 어려운데. 얼마나 그런 단어를 못 말했는지 아내는 연애하던 무렵 숙제처럼 하루 3번씩 시키기도 했다. 만났을 때, 헤어질 때, 잠들기 전 통화할 때. 결혼하고 나서는 숙제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자연스레 사랑 표현이 줄어들고 무뎌졌다.


 아빠와 할아버지와, 아마도 증조와 고조할아버지와 그전의 남자 조상들,과도 틀림없이 다른 아이. 바라건대 아빠 닮지 않았으면 한다. 나와는 달리 말을 예쁘게 하는 어른으로 자랐으면. 무뚝뚝하기보다는 다정했으면. 주는 만큼 받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 만큼, 예쁜 말을 계속 하면 예쁜 말을 계속 들을 수 있을 게다. 자식이 나를 닮았으면 하는 바람도 있지만 제발 나와는 달랐으면 하는 것도 부모 마음인가 보다.


 파이팅이다, 세뇨르.




아이가 좋아해서 자주 들르는 연희동 파스타집 제니스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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