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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BFirefly Sep 11. 2020

상처 받지 않는 사람

나 자신 또는 내게 소중한 (달리 말해, 내가 동일시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부당하게 대우받을 때, 즉, 인격이 존중받지 못하고 어떤 장점이 정당하게 인정받지 못할 때 우리는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 이러한 경우라고 해서 반드시 상처를 받지는 않지만, 상처 받는 일은 대개 이런 경우에 일어난다. 상처 받는 것은 싫은 일이면서도 자주 일어나므로 상처 받지 않는 경지를 동경하게 된다. 때때로 예전에 심하게 상처받았던 일을 기억하면서 마음이 괴로울 때 나는 ‘사실 나는 그때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나는 완벽한 사람이라 그때 아무렇지도 않았다’라고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거짓말에 마음은 적잖이 편해진다.


상처 받지 않는 사람을 좀 자세하게 한번 상상해 보고자 한다. 타고나기를 무한히 너그럽거나, 부처님처럼 도통했거나, 감수성에 무슨 문제가 있거나 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부당하게 대우했다고 해서 화가 나지 않을 것이요, 또 앙갚음을 하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다. 가까운 사람에게 자기를 모욕한 사람의 험담을 늘어놓지도 않을 것이다. 또 이 사람은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용서란 상처입은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 사람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이 나중에 찾아와 용서를 빈다면,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은 처음부터 내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내가 당신을 용서한다는 것은 아예 가능하지도 못합니다.’ 용서를 구하는 용기를 낸 사람은 이때 어떤 허탈함, 심지어 어떤 굴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확실히 더 평온하게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평온이 이 사람의 사고와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것 같다. 그의 말과 생각은 다른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합리적이고 명료할 지도 모른다. 그의 몸의 움직임에는 어떤 독특한 안정된 리듬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특성들은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고,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어느 정도 모방되기도 할 것이다. 특히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하는) 인간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존중하여 대하는 이 사람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동을 받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받을 때 여기에는 마음의 고통뿐만 아니라 그의 부당한 처사로 인한 현실적인 손해도 동반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그가 한 짓은 우리에게 금전적인 손실을 가하거나, 어떤 기회를 빼앗아가거나, 우리의 평판을 악화시킬 수 있다.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비록 부당한 처사 자체에 대해서는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에 동반되는 이러한 해악에 대해서도 우려를 느끼지 않을 것인가? 우리의 주인공이 부처님처럼 도통하여 상처를 안 받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다른 경우라면 그의 평정은 단지 국소적인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더하여 상처받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것에 단점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사람이 힘있는 사람이 아니라 힘없는 사람으로 더 힘있는 사람에게 수시로 부당한 대우를 당하면서 사는 사람인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분노가 쌓여, 더는 자존심이 다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저항을 하게 되며, 또 당연히 그래야할 상황이지만 우리의 주인공은 그렇게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같은 처지에 있는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또 장기적으로 자신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게 되지는 않을까 생각하게도 된다. 이것은 우리의 주인공이 어떤 공적 체제 속의 한 자리에 있는 경우를 상정한 경우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상호작용에서도 어떤 무례한 사람에 대해서는 즉시 명확하게 책망하거나 제재하거나 응징하는 것이 나와 공동체와 그 사람 자신에게도 모두 좋은 경우가 있다. 우리의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필요할 때 과연 이렇게 최선의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도 의문하게 된다.


이어서 이런 사람이 다른 사람이 상처받은 고통에 잘 공감할 수 있을까 의심을 품게도 된다. 예를 들어,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상처를 받았을 때 같이 마음이 아픈 것이 (때로는 당사자보다 더 괴로운 것이) 보통 사람의 심리이다. 내가 이렇게 같은 심리상태에 빠지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이해받는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은 그가 동일시하는 사람과 함께 상처받지 못하므로 이 특별한 사람은 위로받기보다는 오히려 단절감 또는 소외감을 느끼게 되지는 않을까?


반드시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아가다보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직간접적으로 목격하고 그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이럴 때에 우리 자신이 같은 고통을 겪었던 것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해야할지 잘 가르쳐주기도 한다. 그런데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상처받은 고통에 대해 위로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제대로 위로를 건네기 어렵지 않을까?


끝으로 이런 생각도 하게 된다. 상처받지 않는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는 것을 온전히 피하지는 못할 것이다. 부처님도 인간인 이상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을까? 달리 말해, 우리의 주인공도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뉘우치고 때로는 용서를 빌어야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역지사지하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이 사람이 이런 능력을 제대로 갖출 수 있을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상처받지 않는 사람으로 사는 것에 대해 조금 상상해 보았다.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많이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장점의 좋음을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 나는 상처받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되어봤는데 정말로 단점이 더 많다면 그때 다시 내 마음을 보통 마음으로 바꾸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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