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공滑空

by 풍경

어느덧

바람은 짙은 향수를 품고

거친 숨소리를 내며

떠도는 영혼들의 가슴을 붙들고 있다

어깻죽지 짓누르는

생生의 무게에

죽은 듯이 내려앉아

한 소절의 노랫가락 흥얼거리니

이토록

흔쾌한 바람아

네가 가는 길이 어디든

한 점 그림자 되어도 좋으니

드넓은 하늘 따라

가파른 들판 따라

긴 숨의 꼬리가 되어

멀리 활공滑空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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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갑자기 쏟아붓는 빗소리에 일찍 잠에서 깼다. 겨울이 성큼 다가왔음을 평소보다 더 낮은 방 안의 온도와 차가운 손발이 먼저 알아챘다. 몸을 움츠리며 하루를 열었다. 종일 시커먼 하늘과 회색빛 구름이 감도는 창밖을 바라보며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을 끌어올려 보려 했건만 아이들도 날씨의 영향을 받는지 아침부터 제대로 일을 벌였다. 퇴근 시간까지 이리저리 해결하느라 덕분에 마음은 어디에 가 있는지도 몰랐다.

사위가 어둑어둑해진 밤, 바람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지만 여기저기 흩날리는 퇴근길 정경이 아련해지고 차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고단한 하루를 위로하는 듯했다. 차 문을 연 순간, 휑하니 불어오는 바람이 흐릿한 정신에 칼을 들이대듯 머릿속이 선득해졌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마치 바람의 세상 속에 나 홀로 서 있는 착각이 들었다. 제각각의 모양과 소리로 온 존재를 드러내는 바람은 온통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지만 나는 왠지 모를 통쾌함이 느껴졌다.


시시각각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흰 구름과 세차게 흔들거리는 나뭇가지들, 허공을 휘감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지금 서 있는 공간이 비어있으면서도 꽉 채워진 듯한 묵직함으로 다가왔다. 세상 그 무엇과도 시비 붙지 않고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온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니는 바람과의 대면에서 느낀 것은 바로 ‘자유’였다.


문득 어떤 힘도 들이지 않고 오로지 바람의 힘으로만 나는 새, 앨버트로스가 생각났다. 하늘을 믿고 나는 새라 하여 신천옹信天翁이라 불리는 앨버트로스는 하늘에서 날갯짓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빠른 바람, 느린 바람 사이를 오가며 바람길 따라 균형을 유지한 채 활공滑空 한번 만으로도 수십 킬로미터를 날 수 있다고 한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애써 힘들인 시간이다. 그래서인지 에너지 소모가 유독 많았고 심신은 금방 소진되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바람의 유연한 자유로움과 앨버트로스의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11월의 마지막 날, 창밖으로 들려오는 거친 바람 소리가 유난히 정겹다.



이은미 '알바트로스'

https://www.youtube.com/watch?v=ZnCL8ze2Cm4


# 활공滑空 / 2021. 11. 30. punggye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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