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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어떤 계절

by 싱싱샘

입원 수속 마치고 병동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 섰을 때, 온통 회색이었다. 회색 맨투맨, 회색 추리닝, 회색 운동화, 허름하지 않으려다 보니 결국 회색이 겹쳤다. 가자마자 입원복으로 갈아입으니 누구에게도 보일 새가 없었다.


전날까지 열심히 청소를 했다. 당분간 무거운 것도 들지 말라고 하고 잘 시키는 성격도 못 되니 할 수 있는 한 많은 일을 해놓고 가고 싶었다. 들어가며는 마음이 편했다. 일정도 정리됐고, 집안일도 마쳤고, 삶은 계란 여덟 알과 밤고구마 찐 것 다섯 개, 썰어 담은 사과 세 통이 든든했다. 입원 첫날 할 일이 없을 거라는 건 착각이었다. 주 업무는 관장이었는데 정맥주사, 관장의 시간도 지나갔다. 저녁 일곱 시 넘어 수술 스케줄이 나왔다. 3월 5일 첫 수술 7시 50분이었다.


첫 수술이 좋은 거랬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인 친구가 해준 말이라 그것도 좋았다. 눈은 일찍 떠졌고 허벅지까지 오는 압박스타킹 신고 대기하니 조금 떨렸다. 수술 환자 대기실에 앉았다. 일곱 명이 딱 붙어 앉는 작은 공간이다. 여자들은 똑같은 원피스를 입고 있다. 주렁주렁 수액이 걸려 있다. 위생캡을 받아 쓴다. 한 명씩 데리러 온다. 생년월일과 이름을 확인한다. 사라진다. 내가 마지막 일곱 번째 사라지는 여성이었다. SF의 한 장면 같아 큭 웃었지만, 걱정스러웠다. 마음이 무거워지려는 순간 수술실 간호사들에게 인사하는 주치의 선생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잘될 거예요. 나의 선생님은 수많은 여성을 고치셨을 테니 믿기로 한다. 주사 마취니까 금세 의식을 잃을 거라는 말이 끝나고 나는 기억을 잃었다.


나를 부르는 말이 저 멀리에서 온다. 추워요? 추워요! 따뜻한 바람이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살 것 같다. 지금 몇 시냐고 물었는데 11시 30분이라고 했다. 시간이 왜 궁금했을까. 세 시간 반 만에 원래 세상으로 돌아왔다. 목이 말라 입이 안으로 말리는 것 같은 스물네 시간을 침대에 붙들려 있었다. 기억이 희미한 희한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은 수술이란 없다고 생각해왔다. 입원 전, 신상에 문제가 생겼을 때 처리해야 할 일을 우선순위로 정리했다. 평소에 연명치료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장기기증 등록한 것까지 알고 있으니 괜찮았다. 모든 것이 괜찮았는데 수술하고 딱 하루는 힘들었다. 수술 후 숨을 깊게 들이쉬고 길게 내쉬어야 폐가 펴진다고 했는데, 그냥 많이 잤고 생각나면 숨 쉬고 링거 줄이나 어서 떼었으면 했다.


애는 낳았어요?

그럼요. 스무 살도 넘었는데요.


췌장의 돌이 커져 왔다는, 휴게실에서 알게 분은 내가 수술한 걸 알고는 몇 살이나 됐나 싶어 물었다고 했다. 삼 년 전 이곳에서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부산에서 왔는데 전날 그분이 다른 분과 대화하다 나물에 고급 기름을 쓰는 것 같지가 않아, 맛이 없어, 하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 이야길 조용히 들으면 재미있다. 나물이 한번 더 나오면 음미해 봐야겠다 했지만 반찬이 겹치지 않았다. 씩씩하게 걷는 이가 없으므로 병동은 고요했다. 모두가 힘들어 한숨 자는 오후 소파에 앉아 있다 볕이 좋아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수술 후 이틀을 더 병원에 있었다. 수술 당일 체온이 높고 혈압이 낮아 간호사 선생님이 걱정했다. 누워만 있는 건 답답한 일이었다. 배가 헐렁해진 건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배꼽 아래까지 차오른 근종이 사라진 뒤 배가 쏘옥 들어갔다. 지방흡입급이어서 피식 웃음이 났다. 주삿바늘과 배액주머니를 제거한 날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세발 서비스가 있다고 해 받았다. 바로 목욕을 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마음에 안 들어도 받자고 했다. 완벽주의를 좀 버리기로 했으니까. 얼굴로 물이 흘러내렸고 머리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개운했다. 집에 갈 준비가 착착 되고 있었다.


선생님이 회진 왔을 때 난소를 남길 수 있었다고 했다. 호르몬 검사에서 여성호르몬이 남아 있어 몇 년은 생리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그때 그 말은 근종이 더 자랄 거라는 의미였지만, 자궁을 적출한 지금 난소 절제로 인한 갑작스러운 타격은 없을 거란 의미라 감사가 더해졌다. 인생, 참.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받는 건 액세서리 제거와 속옷 탈의 여부였다. 맨몸으로 원피스 하나 걸친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것이 인생임을 수술실에서 배운다. 집안일 싹 해두고 병캉스 간다고 신나게 입원한 나, 퇴원 수속 마치고 무사히 병원을 빠져나온다. 입원 닷새 만에 보조석에 앉으니 봄이 왔더라.


***


빛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터널의 시간이 있었다.

옆도 뒤도 볼 수 없는 채 달려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돌아보니 모두가 어떤 계절이었다. 소녀는 대학에 입학하고 첫 시험을 치렀다. 시험 기간이었지만 적어도 벚꽃의 아름다움은 느낄 수 있는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의사 선생님에게 일상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다. 일상이란 뭘까 잠시 생각했다. 지난 4월, 봄비가 며칠 내린 뒤 갑자기 올랐던 기온이 내려가고 하늘은 푸르고 땅은 촉촉했다. 연초록 나뭇잎의 싱그러움을 다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시간만 나면 밖으로 나갔다. 오래오래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가을 며칠만 주어지는 시간을 온전히 누렸다.


어떤 계절이 지나갔다.

어떤 계절이 오고 있을 것이다.


2025년 여름

당신의 계절에 닿기를 바라며

김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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