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교실에 오세요 09
처음 글쓰기 교실에 온 아이들은 편안하게 평소 쓰던 대로 글을 써본다. 보통 3~4학년은 원고지 노트(400자) 한 쪽 정도를 쓴다. 그 한 쪽이 글의 알맹이가 된다. 그 한 쪽에는 아이가 전하고 싶었던 말이 담기며, 핵심은 한 문장으로 정리된다. 그 분량으로 충분한 글감도 있지만 처음 쓰는 아이들의 글은 대부분 뼈대글이라 살이 없다. 살이 없어서 더 들여다보고 음미할 부분이 없다.
분량은 글의 살이다. 분량을 정하고 그만큼 써보는 경험은, 글의 내용을 채우고, 쓰는 자신감을 만드는 연습이다. 우리는 목표 분량을 시각화하기 위해 ‘깃발’ 표시를 한다.
시험 본 날, 1학년
오늘 국어 시험을 보는 날이다. 쉬울 줄 알았는데 어려워서 틀릴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어려운 게 많아서 한 문제씩 천천히 풀었다. 두 문제 모르는 게 있었다. 한 문제는 감으로 풀었고 한 문제는 그냥 풀었다. 나는 시험 시간이 끝나고도 하고 있었다. 겨우 다 해서 선생님한테 냈다. 그리고 시험지를 보니 한 개가 틀렸다. 그래서 아쉬웠다. 다 맞을 수 있었는데.
내 생각의 반대인 시간, 3학년
나는 매일 7시에 영어를 간다. 그런데 내가 영어를 가기 전에 조금 쉬었다 가려고, 내 가슴은 시간이 빨리 갈까 봐 조마조마하다. 조금을 쉬고 나니 벌써 6시 55분이었다. 이래서 시간은 나의 반대이다. 그리고 또 아빠가 11시까지만 주무신다고 조금만 쉬게 해달라고 할 때면 10시에 있는 짧은바늘과 긴바늘은 아주 느리게 움직인다. 나는 그래서 시계가 정말 얄밉다. 난 그래서 시간이 빨리 갈 때면 허둥지둥 빨리 움직이게 되고, 시간이 느리게 가면 내 가슴은 정말 답답하다. 내 행동을 빠르게, 답답하게 하는 시계이다. 다음엔 시계가 그렇게 내 생각의 반대로 움직이기 전에 빨리 나의 할 일들을 해야겠다. 그렇게 하면 시계도 보지 않고 내 할 일을 스스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문제는 감으로 풀고 한 문제는 그냥 풀고. 다 맞을 수 있었던 아쉬운 시험이다.
내 행동을 빠르게, 답답하게 하는 시계, 얄미운 시계. 쉬려고 하면 빨리 가고 쳐다보고 있으니 느리게 간다. 시계가 내 생각의 반대로 움직이기 전에 빨리 나의 할 일을 하겠다니 얼마나 기특한 글인가. 어른들이 읽고 나서 “빨리 나의 할 일을 한다며?”라는 소리만 안 하면 될 일이다.
1~2학년은 원고지 노트 한 쪽, 3~4학년은 두 쪽, 5학년은 세 쪽을 목표로 한다. 최종적으로, 6학년이 되면 A4 한 장 분량을 쓸 수 있게끔 차근차근 늘려간다. 글은 문장 단위로 만들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문단이다. 고학년이 되면 각 문단의 소제목을 만들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에서 뭉텅이로 빠진 내용이 없나 점검하고, 문단의 핵심에 따른 뒷받침이 부족하지 않은지 보면 된다. 하지만 저학년과 중학년, 고학년이라도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경우에는 한 문장, 다음 한 문장 그다음 한 문장을 잘 이어나가는 게 목표다.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보이듯이, 들리듯이, 느껴지듯이 쓰는 ‘겪은 일 쓰기의 원칙’) 생각해서 한 땀 한 땀 문장 잇는 아이들이 되도록 격려한다. 그때 필요한 것이 분량이다.
대단한 언니, 2학년
어제 나는 언니에게 뜨개질을 배웠다. 그렇게 많이 배워도 뭐라는지 모르겠다.
“끄아아아!”
끝내 나는 소리를 질렀다. 복잡하고, 어렵고, 나는 계속 노력하고, 힘을 쓰고,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이렇게!”
언니가 행동을 보여주고 ‘이렇게’라고 말해도.
“6학년 때 배우라고!”
“싫어!”
언니는 지겨워했고 나는 고집을 피웠다.
“언니”
“왜?”
“언니가 내 것도 떠줘. 응?”
나는 언니에게 내 것까지 맡겼다. 언니는 6학년 지금 언니 쌤한테 목도리를 떠주려고 만들고 있는데도 내 손수건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원래 언니는 2학년 때부터 선생님들한테 목도리를 떠주었던 것이다.
‘자, 이제 기다려볼까?’
나는 기다리고 기다렸다. 마침내! 하루 만에
“끝났다!”
“어디?”
환상적이었다. 크기는 중간 크기고 정사각형이었고 또 언니가 뜨개실을 한 통을 써서 실을 새로 갈아서 이었다.
“끝!”
나는 생각했다.
‘최고 언니!’
언니, 동생 모두 나와 함께 글을 쓰는 자매 글쓰기단이다. 동생 글을 읽으면서 언니가 썼으면 어떻게 썼으려나 궁금해졌고 “언니가 내 것도 떠줘, 응?” 애교 있게 부탁하는 동생이라면 거절하지 못했을 것 같다. 다 떠서 주었을 때 “언니, 환상적이야!” 했다면 또 해주고 싶지 않을까. 참 따스하다.
이 글은 원고지 노트 두 쪽 분량이다. 글은 혼자 써도 되지만 함께 써서 좋을 때가 있다. 함께 목표를 정한 날 도전해서 분량 성공의 경험을 갖게 한다. 몇 번 해보면 충분히 다 쓸 수 있는 양이다. 역으로 생각하면 그동안 그만큼까지 쓰지 않았고, 하고 싶은 말과 필요한 말이 다 안 나왔다는 얘기다.
이렇게 충분히 쓰는 경험을 하면서 나는 ‘뱃속에 있는 글자들을 모두 꺼내놓았다는 마음이 들 때까지’라고 표현한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털어놓았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면서 내가 이 말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구나 하는 생각과 기록해두지 않으면 사라지거나 놓치는 마음을 모은다. 거기까지 쓰자면 힘은 드는데 보람과 기쁨, 만족도 커져 묘하게 또 쓰고 싶어진다.
콩닥콩닥 30분, 5학년
이건 기적이다! 12년 인생을 살면서 고백이라고는 한 번도 못 받아본 ‘모솔’인 내가 고백을 받다니. 그것도 밤 12시에. 지금부터 믿기지 않았던 30분간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때는 20○○년 9월 22일 밤 11시 55분이었다. 숙제를 하느라 바빴던 나는 막 잠자리에 들려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남사친이 나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잠시 그 친구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1학기에 나와 가장 친한 여자친구에게 고백한 아이이다. 그 당시 나는 그 친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 눈치라곤 1도 없는 녀석아!’ 하고 타박을 주었는데 그랬던 아이가 나에게 고백을 한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보자.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친구는 내가
‘누군데?’
하고 문자를 보내자 잠시 답이 없더니
‘나 사실 좋아하는 사람이 넌데 받아줄 수 있어?’
하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장난치는 줄 알았다. (중략) 당당히 말하는 친구에게 당황스러운 마음, 떨리는 마음 등 온갖 마음이 다 들었다. 고민 끝에 나는 ‘알았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에게 ‘알았어.’는 사귀자는 의미가 아니라 ‘너의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라는 의미인데 친구는 사귀자는 것으로 알았는지 기쁜 이모티콘과 ‘잘 자.’라는 문자를 보냈다. 황당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중략)
자꾸 설레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느라 애 좀 먹었는데 그래도 처음 받아본 고백이라 감정이 이상(?)했다. 그럼 이만 12년 인생 첫 번째 고백 이야기를 여기서 마쳐야겠다.
아, 〈콩닥콩닥 30분〉이라는 제목부터 십이 년 인생의 첫 번째 고백이라니 나도 떨린다. 감정이 이상(?)했다에 이르기까지 글이 한달음에 읽히고 여운까지 준다. 그건 삼십 분간의 일이 충분히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여기까지 써야 해, 라고 말하지 않는다. 학년별로 기준이 되는 목표를 알려줄 뿐이고 그날 글감에 따라 글이 짧아질 수도, 길어질 수도 있음은 분명히 한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글감 선택부터 신중해야 하지만, 배우는 동안 물러설 자리는 언제나 필요하다. 글쓰기에 있어 완성이란 없고 꾸준히 해야 할 일, 나아갈 길이라 더 그렇다. 엉덩이를 톡 쳐서 분량을 넘어설 수 있겠다 싶은 날,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 우리의 목표 지점에 깃발을 하나 그립니다. 우리 모두 준비가 잘 되었기 때문에 갈 수 있어요. 오늘은 목표를 훅 지나서 가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다음은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스스로 도전하는 거예요. 내 글이 최종 도착한 지점엔 깃발을 두 개 그려요.”
목표 분량을 한 줄이라도 넘어설 때 ‘깃발 두 개’를 붙인다. 대부분의 아이가 이 경험을 해낸다. 스스로 세운 깃발 두 개는 아이들에게 있어 글의 자존감, 글존감을 높여준다. 그러면 ‘나는 글 좀 써!’ 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다음번에 더 쓰고 싶고, 쓰고 싶어 썼으니 더 잘 쓰게 되는 것이다. 글에 있어 차근차근 분량 늘려가기가 중요한 이유다.
tip 아이들은 글자 크기, 간격이 제각각일 수 있다. 이를 고려해 원고지에 써보기를 권한다. 처음부터 원고지에 쓰면 분량을 가늠할 수 있고 분량이 어느 정도 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