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택배 박스, 욕망이 머물다 간 자리의 씁쓸함

내용물보다 무거운 껍데기, 우리가 배송받은 가짜 위안

by 풍운

퇴근길, 현관문 앞에 덩그러니 놓인 택배 박스 하나를 마주하는 건 이제 지독하게 평범한 풍경이다.

어제 분명히 허리를 굽혀가며 그 귀찮은 분리수거를 끝냈는데, 오늘 문을 열면 또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무심한 종이 뭉치.

그걸 보면 반가움보다는 눅눅한 피로와 정체 모를 불쾌감이 먼저 혀끝을 타고 올라온다.

우리는 대단한 물욕에 눈먼 괴물들이 아니다.

그저 오늘 하루 세상에 난도질당해 너덜너덜해진 자아의 상처 위에 급하게 붙이는 일회용 밴드 같은 것,

혹은 내 삶이 이 거대한 톱니바퀴에서 이탈하지 않았음을 증명받으려 구걸하듯 집어삼킨 위안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 박스는 마치 내가 자본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영수증 같다.

구두를 벗기도 전에 무거운 몸을 숙여 박스를 집 안으로 들고 들어온다.

칼날이 테이프를 거칠게 가르고 내용물을 꺼내는 시간은 1분 남짓.

그 짧은 찰나의 약탈이 끝나면 간절히 기다렸던 그 물건은 금세 거실 풍경 속으로 죽어버린다.

알맹이를 내어준 박스만 덩그러니 거실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다.

그 텅 빈 공간을 응시하고 있자니 내가 정말 저 물건을 원했던 건지,

아니면 결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의 그 비릿하고 짧은 권력감을 삶을 팔아 사고 싶었던 건지 혼란스럽다.

현대인의 거실은 사물로 가득하지만 그걸 향유하는 마음은 늘 지독한 영양실조 상태다.

상사에게 짓밟히고 사회에서 소외당해 피 흘리는 내면을 가리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배송을 요청한다.

박스가 도착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여전히 이 시스템의 먹잇감이 되어 선택할 힘이 있다는 환각을 산다.

우리는 물건을 결제한 것이 아니다. 그 물건이 내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그 짧고 비릿한 설렘을 잠시 빌려 쓰는 일시적인 대가를 지불한 것이다.

하지만 상자를 뜯어낼수록 그 환상은 먼지처럼 흩어지고,

남는 것은 분리수거해야 할 쓰레기와 내 수명을 갉아먹는 카드 명세서뿐이다.

분리수거 날, 납작하게 접힌 박스를 한 아름 들고 나가며 우리는 느낀다.

이 먼지 날리는 종이 조각들이 사실은 내 귀한 시간을 조각내어 맞바꾼 피와 살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내가 사들인 그 모든 무용한 것들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외면하고 내 영혼을 헐값에 넘긴 대가가 섞여 있다.

우리는 물건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명력을 잘라 팔아 저 무거운 종이 성벽을 쌓고 있는 셈이다.

이 소유의 과정에서 사물에 대한 예우나 깊은 사유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직 문 앞의 투박한 '쿵' 소리와 인증 사진 한 장만이 존재할 뿐이다.

더 서글픈 것은 이 순환 과정에서 인간의 존엄은 소거되어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밤샘 노동과 찢어진 신발 밑창을 딛고 내 집 앞까지 도착한 그 상자가 나의 안락을 위해 소모되는 잔인함.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편리함으로 포장해 나의 가짜 평온을 유지하는 시스템의 비겁하고도 가련한 공모자들이다.

거실 구석에 남은 종이 조각들은 묻는다. 정말 이 물건이 당신을 구원했느냐고.

혹은 당신의 텅 빈 하루를 잠시나마 소유의 온기로 덮고 싶었던 비명이 아니었느냐고.

결국 그 안에서 나오는 것은 또 다른 공허와 유행이 지나면 쓰레기가 될 플라스틱 덩어리뿐이다.

욕망을 집어삼킨 위장은 포화 상태지만, 정작 영혼은 지독한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박스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채우지 못한 내면의 막막함과 다시 기계처럼 출근해야 한다는 현실이다.

오늘 저녁, 당신의 문 앞을 가로막은 그 박스를 보며 질문해 보길 바란다.

이 상자가 사라지면 당신에게 남는 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정말 물건의 주인인가, 아니면 끝없는 결제의 굴레 속에서 서서히 마모되어 가는 노예인가.

박스를 짓이기며 뱉어내는 그 짧은 한숨은 사실 이 잔인한 물류의 사슬 속에서 간신히 터져 나온 우리의 마지막 신음이다.

그 누런 종이 성벽을 다 치우고 난 뒤 차가운 거실 바닥에 홀로 선 당신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소유하려 애썼던 단 하나의 쓸쓸한 실체일지도 모른다.

재활용 수거함 속에 뒤엉킨 날카로운 박스의 단면들은, 어느새 우리가 헐값에 팔아넘긴 생의 파편들을 증언하며 서 있다.

이제는 떼어낼 수 없는 접착테이프 자국처럼 비겁한 위안의 흔적들이 우리의 일상 위에 덕지덕지 눌러앉는다.


우리가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는 것은 물건의 실체가 아니라, 소유라는 환각을 빌려 나의 쓸모와 생존을 증명받으려 애쓰는 비겁한 안도감의 다른 이름일 뿐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