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약봉지 속의 시간, 잊힌 정성의 유통기한

서랍 구석에 남겨진 무심한 안부에 대하여

by 풍운

어느 날 서랍 깊숙한 곳을 정리하다가 누렇게 변색된 약봉지 하나를 발견한다.

먼지를 털어내고 읽어 내려간 봉투 위에는 오래전 나의 이름과 함께 '식후 30분, 하루 세 번'이라는 투박한 글씨가 적혀 있다.

한때는 나의 하루를 온통 지배했을 그 절박한 명령어가, 이제는 아무런 효력도 없는 낡은 종이 한 장으로 남아 나를 마주한다.

약봉지는 우리 삶에서 가장 아팠던 순간의 증거물이다.

몸의 열기가 끓어오르거나 마음의 어딘가가 무너져 내릴 때, 우리는 이 작은 종이 주머니에 기대를 걸고 생을 의탁한다.

그 안의 알약들이 나의 고통을 갉아먹어 주기를, 내일 아침에는 조금 더 가벼운 몸으로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라며 쓰디쓴 약을 삼켰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이 잦아들고 몸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하면, 우리는 약봉지를 가장 먼저 잊어버린다.

남아있는 알약들은 다 먹지 못한 채 서랍 구석으로 밀려나고, 나를 돌보던 그 끈질긴 정성 또한 회복이라는 축제 뒤편으로 조용히 자취를 감춘다.

우리의 감사함은 왜 고통의 유통기한보다 짧은 것일까.

문득 약봉지에 적힌 날짜를 가늠해 본다. 그 시절, 나를 위해 이 약을 지어주었던 손길을 생각한다.

약사 봉투를 건네주며 "꼭 챙겨 드세요"라고 말하던 다정한 목소리, 혹은 곁에서 물컵을 건네주며 나의 안부를 살피던 누군가의 눈빛.

낡은 약봉지는 단순히 약을 담았던 그릇이 아니라, 내가 가장 취약했을 때 나를 지탱해 주었던 타인의 온기가 머물렀던 자리다.

하지만 우리는 건강해진 뒤에 그 온기를 '과거의 일'로 치부해버린다.

필요가 사라진 자리에는 무심함만이 들어선다. 약봉지가 서랍 구석에서 오랜 시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또한 누군가의 간절했던 배려를 서랍 속에 방치해 둔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삶의 흉터는 아물어도 그 흉터를 치료하기 위해 쏟았던 시간의 흔적은 약봉지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유통기한이 지나버려 이제는 먹을 수 없게 된 알약들을 보며, 나는 내가 잃어버린 것이 단순히 약의 효능만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것은 가장 아픈 순간 곁을 지켰던 사람들에 대한 예의이자, 나 자신을 돌보려 했던 최소한의 성실함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건강과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정작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새로운 무엇이 아니라, 서랍 구석 약봉지처럼 우리가 딛고 일어선 과거의 숱한 보살핌들이다.

무심하게 버려지는 종이 한 장에도 누군가의 직업 정신과, 나의 회복을 바라는 우주의 미세한 기도가 섞여 있었음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아차린다.

서랍 깊숙이 잠들어 있던 약봉지를 비로소 마주한다.

이 낡은 흔적을 지우는 일은 먼지를 털어내는 단순한 청소가 아닌, 아픈 나를 지탱해주던 타인의 지극한 노고와 그 고단했던 세월을 비로소 내 안에서 놓아주는 마지막 환송과도 같다.


우리는 건강해진 뒤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약의 성분이 아니라, 약봉지에 이름을 적어 넣던 누군가의 따스한 마음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