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류장 의자 위 종이박스, 이름 모르는 이의 사랑

당신의 엉덩이가 시리지 않길 바라는 누군가의 ‘몸짓’

by 풍운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 저녁이면, 버스 정류장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의 어깨는 한없이 움츠러든다.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멀기만 한데, 잠시 몸을 기댈 정류장의 철제 의자는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차가운 냉기를 뿜어낸다. 얼음장 같은 그 의자에 선뜻 엉덩이를 붙이는 것은 웬만한 용기로는 불가능한 일이라, 사람들은 지친 다리를 이끌고도 차마 앉지 못한 채 서성거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차가운 의자 한 귀퉁이, 누군가 펼쳐 놓은 낡은 종이박스 한 조각이나 얇은 스티로폼 방석이 놓여 있는 풍경을 마주할 때가 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그 자리에 앉아 온기를 나누었는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미미한 온기가 그 비루한 종이 위에 옅게 남아 전해진다. 이 보잘것없는 종이박스 조각은 도시의 비정한 겨울을 건너게 하는 가장 실질적이고도 정직한 사랑의 증거다.

이 종이박스를 두고 간 이는 아마도 근처 마트에서 물건을 담아 왔거나, 길가에 버려진 박스를 손으로 정성껏 펴서 자신만의 임시 자리를 만들었을 테다. 자신이 탈 버스가 도착했을 때 그 종이박스를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기어이 그 자리에 종이박스를 남겨두는 선택을 했다. 뒤에 올 누군가의 살결이 차가운 철제 의자에 닿아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기를 바라는, 아주 구체적이고도 감각적인 다정함이 그 작은 '몸짓'에 깃들어 있다.

우리는 보통 사랑을 거창한 담론이나 뜨거운 감정의 교류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사실 진짜 연대는 이처럼 서로의 '피부'가 느끼는 고통을 가만히 짐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종이박스를 남긴 이는 자신의 엉덩이가 따뜻해지는 것만큼이나, 다음에 앉을 낯선 이의 체온이 지켜지기를 진심으로 바랐을 것이다. 보상을 바랄 수도 없고 누가 앉을지도 모르는 무명의 행동이지만, 그 안에는 인간이 인간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깨끗하고도 본능적인 배려가 담겨 있다.

이 투박한 몸짓은 삭막한 도심 속에서 우리가 여전히 서로의 고통을 감각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는 가장 낮은 곳의 대화다. 버스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 종이박스는 단순한 쓰레기가 아니라, 먼저 다녀간 이가 보내는 따뜻한 초대장과도 같다. "여기 앉으세요, 생각보다 따뜻합니다"라는 소리 없는 목소리는 종이박스에 앉는 사람의 몸을 타고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든다. 세상이 아직은 나를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아주 작은 확신, 그 확신은 다시 누군가에게 전해질 또 다른 다정함의 씨앗이 된다.

우리 삶의 굽이진 정류장 위에도 얼마나 많은 '무명의 방석'들이 놓여 있었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내가 알아채지도 전에 누군가 예열해 둔 차가운 현실의 자리들, 혹은 뒤에 올 사람을 위해 조금씩 남겨둔 여유와 배려들. 우리는 수많은 타인의 다정함에 빚을 지며 얼어붙은 세상을 간신히 건너고 있다. 그들이 남긴 낡은 종이 한 장 덕분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온기를 얻었고, 다음 정류장에서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줄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정류장 의자 위에서 바스락거리는 저 종이박스는 우리에게 말한다. 세상이 아무리 차갑고 비정하게 돌아가도, 우리가 서로의 '시린 자리'를 걱정하는 감각을 놓지 않는 한 온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이다. 도시는 각자의 갈 길을 향해 흩어지는 파편화된 공간처럼 보이지만, 정작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이토록 사소하고 낮은 곳에서 발견되는 체온의 나눔이다. 가장 흔하고 값싼 종이 한 조각이, 사실은 이 도시의 그 어떤 세련된 가구보다도 더 인간적인 위로를 건네고 있는 셈이다.

다음 버스가 도착하고 종이박스의 새 주인이 그 자리에 앉을 때, 그는 아마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이 앉은 자리가 단순히 종이 한 장의 두께가 아니라, 앞서간 이가 남겨둔 배려의 깊이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따뜻한 온기에 기대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마음속에도 낯선 이가 남긴 다정함이 작은 모닥불처럼 피어오를 것이다. 사랑은 그렇게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살결을 타고 온 세상을 순환한다.

오늘도 차가운 철제 의자 위에서 누군가의 엉덩이를 기다리는 저 낡은 종이박스는, 비정한 도심의 겨울을 사람의 체온으로 데우는 가장 작고도 확실한 연대의 마지노선이다.


타인의 살결이 닿을 자리를 걱정해 남겨둔 종이 한 장은, 얼어붙은 도심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의 온기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장 투박한 사랑의 이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