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겨 나가지 못한 삶의 잔해, 배수구에 엉킨 검은 고백

뜨거운 물살 아래서도 끝내 녹지 못한 처절한 실타래

by 풍운

하루의 고단함을 씻어내기 위해 모여든 동네 목욕탕, 수증기 가득한 타일 바닥 끝자락에는 물길이 마지막으로 모이는 배수구가 있다. 요란한 물소리와 비누 거품이 사라진 그곳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머리카락들이 뒤엉킨 채 시커먼 뭉치를 이루고 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의 머리 위에서 삶의 무게를 함께 짊어졌을 그 가느다란 줄기들은, 이제 주인의 몸을 떠나 하수구 구멍을 필사적으로 가로막고 있다. 그것은 털어버리고 싶었지만 끝내 완전히 씻어내지 못한 우리 삶의 치열하고도 구차한 흔적들이다.

이 뒤엉킨 실타래는 '생존의 소모'를 정직하게 보여준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는 주인이 오늘을 버티기 위해 쏟아부은 스트레스와 피로의 기록이 고스란히 박혀 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리며 휴식을 꿈꾸는 동안, 몸은 정직하게 그 고단함의 증거들을 밖으로 밀어낸다. 배수구에 맺힌 검은 뭉치는 나에게 묻는다. 너는 너를 지키기 위해 오늘 얼마나 많은 너의 일부를 바닥에 흘려보냈느냐고. 우리가 깨끗해졌다고 믿으며 욕탕을 나설 때, 사실 바닥에는 우리가 차마 감당하지 못한 삶의 흔적들이 흉물스럽게 남겨진다.

우리는 보통 상쾌해진 살결에만 집중하지만, 진짜 삶의 본질은 이처럼 ‘밀려나 버려진 것들의 혼탁함’에 있다. 머리카락 뭉치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처절한 희생의 기록이다. 욕실의 샴푸 향기 밑바닥에서 물때와 뒤섞인 저 잔해들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생물학적 고단함을 여실히 드러낸다. 화려한 외출을 위해 다듬고 치장했던 그 모든 자존심이, 이곳에서는 오직 배수구를 막는 '오물'로 취급받으며 거칠게 수거될 뿐이다.

이 끈질긴 뭉치들은 도심의 세련된 질서 뒤에 숨겨진 ‘익명의 연대’를 일깨우기도 한다. 부유한 자의 머리카락과 가난한 자의 머리카락이 배수구 안에서는 구별 없이 뒤섞여 하나의 거대한 얼룩을 만든다. 각자의 삶은 다르지만, 그들이 쏟아낸 고통의 찌꺼기들은 이 좁은 구멍에서 비로소 서로 엉킨다. 그 혼탁한 뒤섞임 속에는 고결한 철학 대신, "오늘 하루도 살아남느라 애썼다"는 몸들의 처절한 고백만이 가득하다.

배수구의 검은 얼룩은 우리에게 말한다. 세상이 아무리 완벽한 정화를 약속해도, 삶은 반드시 무언가를 탈락시키고 버려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꽉 막힌 구멍을 뚫기 위해 누군가가 걷어 올린 젖은 뭉치를 보며 경건함이 느껴지는 이유는, 그곳이 바로 한 존재의 소멸한 조각들이 다른 존재의 일상을 위해 비워져야 하는 가장 치열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성찰은 그렇게 배수구의 머리카락처럼 지저분하게 다가오지만, 그 뒤에 비로소 우리는 타인의 결핍을 기꺼이 받아낼 유연한 마음을 얻는다.


배수구에 엉킨 머리카락 뭉치는, 단 하루의 청결을 위해 우리가 몸소 떼어내야만 했던 고단한 생존의 잔해이자 정직한 얼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