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에 걸린 검정 비닐봉지, 비루한 자화상

한때는 소중했던 것들의 비참한 생존

by 풍운

도심의 가로수 위,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몇 잎의 잎새들 사이로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흉물스럽게 걸려 있다. 한때는 누군가의 저녁 찬거리를, 혹은 시린 손을 녹여줄 따뜻한 온기를 정성스럽게 품어 날랐을 소중한 도구였다. 그러나 내용물을 비워낸 순간 그것은 가차 없는 폐기물이 되어 허공으로 던져졌고, 이제는 날카로운 가지 끝에 몸이 꿰인 채 비명 같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사람들은 푸른 잎들 사이를 가린 저 검은 흔적을 도시의 미관을 해치는 오물이라 부르며 손가락질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독하게 공중에 매달린 생존의 기록이다. 단단한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바람을 타고 멀리 날아가지도 못한 채, 찢긴 몸으로 나무의 일부가 되어버린 처지. 빗물에 젖어 무거워지고 칼바람에 사정없이 흔들리면서도, 그것은 가지를 놓지 않는다. 아니, 가지가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 절망적인 결박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우리의 삶 또한 어느 지점에서는 이 비닐봉지의 처지와 닮아 있다. 누군가에게 요긴하게 쓰이던 전성기를 지나, 쓸모가 다했다는 판정을 받은 뒤 어딘가에 걸려 꼼짝달싹 못 하는 고립의 순간들. 잊히고 싶어도 잊히지 못하고, 흉물스러운 모습 그대로 세상의 시선을 견뎌야 하는 고단함. 하지만 그 찢긴 틈새로 바람을 통과시키며 끝내 떨어지지 않는 모습은, 존재를 부정당한 자리에서 어떻게든 흔적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존엄의 발악처럼 보인다.

높은 곳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펄럭이는 저 검은 조각은 침묵 속에서 외친다. 버려졌다고 해서 그 안의 기억까지 가벼웠던 것은 아니라고. 흉측하게 변해버린 지금의 모습이 내 본질의 전부가 아니라고. 도시는 매끈한 유리벽으로 성공을 찬양하지만, 정작 생의 진실은 날카로운 현실에 몸이 뚫린 채로도 끝까지 매달려 있는 저 비루한 비닐의 안간힘 속에 있다. 짓눌린 자리에서 소리 없이 울부짖으며 제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가장 낮은 곳에서 발견한 생존의 비릿한 골조다.

우리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그 광경을 외면하지만, 정작 위기의 순간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거창한 신념이 아니라 이토록 위태로운 자리에서도 끝내 놓지 않는 질긴 생의 본능이다. 곁에 남은 몇 장의 잎새가 끝내 떨어져 나갈 때까지, 비닐은 차가운 가지의 감각을 기억하며 매달릴 것이다. 그리고 그 비참한 버팀이 모여, 어딘가에서 홀로 고립된 채 견디고 있을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묵묵히 지탱해낸다.

오늘도 높은 가지 위에서 찢긴 몸으로 세상을 견디는 저 비닐봉지는, 가장 비천한 자리에서 생의 의지를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날카로운 현실에 몸이 꿰여 흉물로 남았을지라도, 허공을 움켜쥔 채 끝내 추락을 거부하는 저 비루한 떨림이야말로 생이 내미는 가장 처절한 존엄의 손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