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불행을 통해 나의 평온을 확인하는 비겁한 거울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고백을 들으며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짓는다. 어깨를 다독이고, 진심 어린 말들을 건네며 우리가 얼마나 타인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애쓴다. 하지만 그 사려 깊은 순간, 마음 한구석을 스치는 묘하고도 명징한 감각이 있다. '적어도 지금 나는 저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다'라는, 스스로도 깜짝 놀랄 만큼 비겁한 안도감이다. 우리가 건네는 위로의 문장들은 사실 타인을 구원하기 위한 손길인 동시에, 내가 아직은 안전한 지대에 머물고 있음을 확인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혼잣말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왜 타인의 절벽 앞에서 비로소 나의 평지를 실감하게 되는 것일까. 경쟁이 일상이 된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비교를 통한 생존 확인을 학습시킨다. 행복은 마음의 충만함보다는 남보다 덜 어렵다는 사실에서 오는 안도감이 되어버렸고, 타인의 아픔은 내가 누리는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극적으로 일깨워주는 대조군이 된다. 우리가 쏟아내는 다정한 조언들 이면에는 '내가 처한 환경은 저렇지 않아서 다행이다'라는 소박하면서도 잔인한 만족감이 독버섯처럼 피어오른다. 위로는 그렇게 타인의 상처를 응시하며 나의 매끄러운 일상을 재확인하는 서글픈 과정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순은 우리를 자책하게 만든다. 겉으로는 슬픔을 함께하는 동반자처럼 굴지만, 속으로는 누군가의 고난을 발판 삼아 나의 평온을 재는 자신을 발견할 때 인간적인 자괴감이 밀려온다. 하지만 이러한 이중성은 우리를 비난하기보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보편적인 방어 기제에 가깝다. 미디어는 끊임없이 누군가의 극적인 시련을 전시하고, 우리는 그것을 보며 '내 삶은 저들에 비하면 괜찮다'라는 가짜 평안을 얻는다. 진정한 마음의 울림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서로의 불행을 계량하며 자신의 위치를 안심하는 서글픈 비교뿐이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건네는 '괜찮아질 거야'라는 말은 얼마나 위태로운가. 그것은 고통받는 이를 향한 응원이기도 하지만, 그 어두운 감정이 나의 평온을 침범하기 전에 서둘러 선을 그으려는 본능적인 회피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슬픔에 깊이 연루되어 함께 무너지기보다는, 적당한 거리에서 다정함을 유지하며 나의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조급함이 위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우리는 타인의 어려움을 바라보며 그 고통에 데지 않을 만큼의 거리에서 자신의 평온을 즐기는 조심스러운 목격자들이다. 다정함이라는 외피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그 속에 숨은 작은 안도감을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이제 이 거울 앞에 정직해져야 한다. 누군가의 아픔을 나의 안심을 위한 도구로 쓰지 않으려면, 위로의 말을 건네기 전에 스스로의 비겁함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마음의 벽을 허무는 시작은 '나는 다행이다'라는 안심이 아니라, '나 또한 언제든 저 자리로 밀려날 수 있다'는 연약함을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비교를 통해 얻는 평온은 썰물에 씻겨나가는 모래성과 같아서, 타인의 시련이 나의 문 앞까지 도달하는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타인보다 낫다는 착각이 아니라, 누군가의 고통을 나 자신의 일처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감각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타인의 불행을 딛고 안심하라고 속삭이지만, 우리는 그 유혹을 거절하고 누군가의 슬픔 옆에 묵묵히 자리를 잡는 법을 배워야 한다. 위로가 나의 안녕을 재확인하는 수단이 아니라, 서로의 약함을 긍정하는 겸허한 증거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사람의 마음을 나눌 수 있다. 비겁한 안도감을 걷어낸 자리에서 피어나는 서툰 침묵이야말로, 수천 마디의 매끄러운 말보다 훨씬 진실한 마음이 될 수 있다. 누군가의 아픔을 이용하지 않는 정직한 마주함, 그것이 이 고단한 시대에 우리가 서로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진심이다.
타인의 눈물을 닦아주며 마음속에 스미는 작은 안도를 발견할 때, 우리는 가장 다정한 표정으로 인간의 본능이 얼마나 연약하고도 모순적인지를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