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양원, 세련된 포장지로 가린 현대판 고려장

전문적인 케어라는 명분 뒤에 숨긴 죽음의 격리와 유기

by 풍운

도심 외곽의 깔끔한 건물, 하얀 가운을 입은 친절한 직원들, 그리고 '전문적인 케어'라는 선전 문구가 적힌 팸플릿. 우리는 이곳에 부모를 모시며 비로소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했다는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집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병수발과 치매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해방감을 '더 나은 환경을 위한 선택'이라는 그럴듯한 수사로 포장한다. 하지만 그 세련된 문을 닫고 돌아오는 길, 우리 마음 한구석을 찌르는 서늘한 감각은 감출 수 없다. 그것은 효도가 아니라, 죽음의 냄새를 우리 삶의 반경 밖으로 밀어내기 위해 치러진 값비싼 유기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부모의 마지막을 시설이라는 이름의 격리소로 보내는가. 현대의 주거 공간은 더 이상 늙고 병든 육신을 품어줄 만큼 넉넉하지 않으며, 우리의 일상은 타인의 고통을 돌볼 만큼 한가롭지 않다. 자본주의가 설계한 효율적인 삶의 궤적 안에서 병든 노인은 치워야 할 짐이자, 생산성을 저해하는 걸림돌로 취급받는다. 요양원은 이러한 우리들의 죄책감을 합리적으로 세탁해주는 거대한 면죄부 공장이다. 매달 입금되는 요양비는 부모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를 사는 비용이며, 우리는 그 돈을 지불함으로써 비정한 자식이라는 낙인으로부터 교묘하게 도망친다.

요양원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얼마나 기능적인가. 정해진 시간에 배식받고, 정해진 시간에 기저귀를 갈며, 이름 대신 침대 번호로 불리는 노인들은 그곳에서 서서히 자신의 존엄을 잃어간다. '안전'이라는 명목하에 가해지는 구속과 통제는 그들을 한 명의 인간이 아닌, 처분만을 기다리는 물건으로 전락시킨다. 우리는 "집보다 그곳이 더 안전하고 편안하실 거야"라고 스스로를 속이지만, 정작 그곳에서 창밖을 보며 자식의 발소리를 기다리는 노인의 절망은 외면한다. 그것은 과거 산속에 부모를 버리고 오던 고려장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장소가 삭막한 산등성이에서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콘크리트 건물로 바뀌었을 뿐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이러한 격리가 우리 사회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를 극도로 무디게 만든다는 점이다. 죽음은 삶의 일부로서 마땅히 곁에서 지켜보며 애도해야 할 과정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요양원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가두어버렸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어떻게 늙어가고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배우지 못한 채, 죽음을 그저 병원 전산망에 뜨는 데이터 한 줄로 인식한다. 죽음의 냄새를 집 밖으로 밀어낸 자리에 남은 것은 깨끗하고 매끄러운 일상이지만, 그 대가로 우리는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삶의 유한함을 성찰할 기회를 영원히 박탈당했다.

우리는 이제 이 '전문적인 케어'라는 말의 허상을 정면으로 응시해야 한다. 부모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차가운 의료 기기들의 기계적인 돌봄이었는지, 아니면 비좁은 거실일지언정 자식의 온기가 느껴지는 익숙한 공간이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시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우리가 건넸던 "곧 다시 모시러 올게요"라는 거짓말은 사실 부모를 위한 위로가 아니라, 내일의 내 일상을 지키기 위한 비겁한 자기최면이었다. 돈으로 산 효도는 결코 마음의 구원을 주지 못하며, 우리가 밀어낸 그 죽음의 그림자는 머지않아 우리 자신의 미래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요양 시설의 확충을 복지의 실현이라 광고하지만, 진정한 복지는 노인이 자신이 살던 곳에서 인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 기계적인 돌봄이 넘쳐나는 곳에서 인간의 영혼은 말라 죽는다. 우리가 부모를 시설로 보낼 때 찢어버린 것은 단순히 가족의 유대가 아니라, 한 인간이 평생을 바쳐 일구어온 삶의 궤적 그 자체다. 이제는 그 비정한 효율성을 멈추고, 우리 삶의 공간 안에 죽음과 쇠락의 자리를 다시 내어주어야 한다.


우리가 요양원 문 앞에 버리고 온 것은 늙은 부모의 육신이 아니라, 언젠가 똑같은 길을 걷게 될 우리 자신의 처량한 미래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