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도 관광의 두 얼굴, 체면과 죄송함 사이의 간극

부모의 기쁨보다 자식의 부채감을 덜어내기 위해 결제되는 서글픈 여행권

by 풍운

공항 출국장, 부모님 두 분만 떠나는 해외 여행길을 배웅하는 자식들의 뒷모습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주변에 "부모님 해외여행 보내드렸다"는 말을 당당히 하기 위해, 즉 자신의 사회적 체면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여행 티켓을 끊는다. 이들에게 효도 관광은 부모의 즐거움보다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세련된 전시 행정이며, 자식 노릇을 다했다는 증빙 서류를 제출하는 행위와 다름없다. 반면, 마음은 늘 굴뚝같았으나 팍팍한 경제 사정에 밀려 매번 계획을 접어야 했던 자식도 있다. 이들에게 이번 여행은 수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삼키며 차곡차곡 쌓아온 부채감을 뒤늦게 털어내는 처절한 안간힘이자, 부모님의 시간 앞에 드리는 고해성사다.

체면치레로 보내드리는 자식에게 부모의 여행은 효율적인 '퉁치기'다. 평소의 무관심을 비싼 패키지여행 한 번으로 상쇄하려는 이 비겁한 면죄부 시스템 속에서, 부모의 존엄은 자식의 품위를 높여주는 소품으로 전락한다. 여행지에서 부모가 느낄 외로움이나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결제한 금액의 크기가 곧 자신의 효심이라 믿는 자본의 논리가 지배한다. 이들에게 효도 관광은 부모를 위한 선물이 아니라, 향후 발생할지 모를 도덕적 비난을 미리 방어하기 위해 지불하는 일종의 보험금과 같다. 마음이 비어 있는 자리에 들어선 화려한 여행 일정표는 그저 차가운 데이터의 나열일 뿐이다.

반대로 미안함을 갚기 위해 티켓을 쥔 자식에게 효도 관광은 서글픈 할부 결제다. 빠듯한 형편에 한 푼 두 푼 모아 마련한 여행권에는 부모님의 작아진 어깨를 외면해온 지난날의 소회와 죄책감이 촘촘히 박혀 있다.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라는 핑계 뒤에 숨겨두었던 부모님의 세월을 이제야 돈으로나마 보상하려는 이들의 여정은 눈물겹다. 하지만 이 애틋한 정성 역시 역설적으로 자본의 힘을 빌려야만 효를 증명할 수 있는 현대 사회의 비정한 단면을 보여준다. 부모님과의 소박한 일상을 지키지 못한 자책을 단 며칠간의 화려한 외출로 대신하려는 노력은, 어쩌면 자식 스스로가 무너진 존엄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일지도 모른다.

결국 효도 관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이 여행의 본질은 자식들의 각기 다른 결핍을 채우는 과정이다. 누군가는 자만심을 채우고, 누군가는 미안함을 비워낸다. 부모님 두 분만이 낯선 땅으로 떠나는 비행기를 바라보며 자식들은 비로소 '자식 노릇'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잠시 해방된다. 하지만 우리가 입금한 여행 경비가 부모님의 외로움까지 결제해줄 수는 없다. 시스템이 제공하는 안락함이 부모 자식 간의 정서적 단절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화려한 패키지 여행권이 부모의 마음속에 새겨진 적막을 가리는 가림막이 될 때, 효도는 그 본질을 잃고 거래의 영역으로 전락하게 된다.

오늘도 수많은 부모가 자식이 보낸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들이 여행 가방에 담아가는 것은 이국적인 풍경에 대한 기대일까, 아니면 돌아와서 자식에게 들려줄 고맙다는 인사말의 부담감일까. 편리한 자본의 논리가 부모를 향한 진심 어린 보살핌을 대신하게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정말로 고민해야 할 것은 여행지의 등급이 아니라, 부모님이 홀로 견뎌온 거실의 무게를 어떻게 함께 나눌 것인가 하는 점이다. 효도의 본질은 영수증에 찍힌 숫자가 아니라, 여행이 끝난 뒤 돌아온 텅 빈 집에서 부모님의 전화를 기다리며 안부를 묻는 일상의 지속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약한 일등석 티켓은 부모를 향한 지극한 공경이 아니라, 그분들의 고독을 외면해 온 나의 소홀함을 덮기 위해 지불한 뒤늦은 정산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