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플라스틱 통에 담긴 끼니로 소외를 삼키는 현대인의 허기
'가성비'라는 세련된 말은 현대인의 남루한 식사를 가려주는 가장 훌륭한 방패막이가 된다. 편의점의 차가운 진열대 위에서 고심 끝에 고른 도시락 한 통을 들고 구석진 1인석에 앉아 끼니를 때우는 풍경은,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지독한 단절의 실상이다. 전자레인지의 거친 기계음과 함께 데워진 인스턴트의 열기는 결코 사람의 온기를 대신할 수 없으며, 플라스틱 수저가 매끄러운 식판에 부딪히는 건조한 소리는 우리 영혼의 허기를 더욱 짙게 만든다. 우리는 한 끼의 영양소를 섭취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상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신의 소외를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바쁘다는 핑계로, 혹은 효율적이라는 합리화로 타인과 마주 앉아 밥을 먹는 수고를 기꺼이 생략한다. 식탁 위에서 오가던 따뜻한 대화와 정은 사라지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기계적인 칼로리 보충만이 남았다. 소셜 네트워크 속에는 화려한 만찬과 미식의 향연이 넘쳐나지만, 현실의 우리는 편의점의 창백한 형광등 아래서 가장 고독한 식사를 수행한다. 이 만찬은 우리가 타인과 깊게 연결될 능력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으며, 스스로를 거대한 사회적 시스템의 부속품으로 길들이고 있다는 서글픈 고백이다. 투명한 플라스틱 덮개 너머로 보이는 규격화된 반찬들은, 마치 우리 자신의 규격화된 삶을 투영하는 듯해 더욱 처량하다.
더 비참한 것은 이 고립된 식사가 '혼밥'이라는 트렌디한 용어로 포장되며 그 비정함이 희석된다는 점이다. 자본은 혼자 먹는 행위를 쿨하고 독립적인 라이프스타일이라 치켜세우지만, 그 이면에는 관계 맺기에 지쳐 도망쳐온 현대인의 비겁한 안식이 숨어 있다. 따뜻한 밥상 공동체가 해체된 자리에 들어선 것은 유통기한이 찍힌 공장제 가공식품들이며, 우리는 그것들을 씹으며 인간적인 교감이 주는 번거로움을 피해 숨어든다. 좁은 바(bar)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서로의 얼굴조차 보지 않은 채 스마트폰 액정만 응시하며 수저를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은, 흡사 연료를 주입받는 기계들의 행렬과 닮아 있다. 배를 채우고 난 뒤 찾아오는 것은 포만감이 아니라, 누구와도 연결되지 못했다는 지독한 공허함과 입안에 남은 인공 감미료의 씁쓸한 뒷맛뿐이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차가운 플라스틱 통 안에 담긴 것이 진정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양식인가, 아니면 우리를 서서히 죽여가는 고립의 독약인가. 정성껏 차려진 밥상 한 귀퉁이의 온기보다, 편리하게 사들인 도시락의 효율을 택한 대가는 혹독하다. 식탁에서의 단절은 곧 삶에서의 단절로 이어지고, 우리는 점점 더 자기만의 좁은 방 안으로 침잠해간다. 가성비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아낀 것은 돈과 시간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한 소통의 기회와 타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마지막 권리였다. 우리가 아낀 그 몇 천 원의 대가는 결국 우리 영혼의 아사(餓死)로 돌아올 것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당신에게 간편하고 빠른 식사를 권하겠지만, 당신은 때로 번거롭더라도 누군가의 온기가 담긴 밥상을 마주해야 한다. 플라스틱 뚜껑을 열 때 올라오는 수증기는 결코 누군가가 나를 위해 정성스레 지은 솥밥의 구수한 향기를 대신할 수 없다. 편리함이라는 덫에 걸려 자신의 식탁을 사막으로 만들지 마라. 고립된 채 삼키는 끼니는 육체는 지탱할지언정, 당신의 영혼을 비계처럼 출렁이게 하고 마음의 근육을 퇴화시킬 뿐이다. 혼자 먹는 밥이 편해지는 순간, 당신은 세상으로부터 잊히는 법을 스스로 연습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차갑게 식은 도시락을 삼키며 우리가 진정 갈구했던 것은 배부름이 아니라, 수저를 부딪치며 나누던 그 옛날의 시끄러운 온기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