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뼈의 고백, 포식자가 삼킨 비릿한 생(生)

튀김옷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앙상한 진실

by 풍운

어젯밤, 모두가 잠든 정적 속에서 야식의 잔해를 정리하다가 손끝에 걸리는 차가운 감촉에 멈칫했다.

기름때가 밴 상자 구석, 먹다 남은 무 조각과 함께 널브러진 앙상한 다리뼈 하나.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내 입안에서 뜨거운 기름기와 쫄깃한 살점으로 나를 황홀한 포만감에 젖게 했던 존재다.

하지만 모든 축제가 끝나고 오직 하얀 뼈만 남은 이 형체를 빤히 응시하고 있자니, 갑자기 미안함도 아니고 혐오감도 아닌, 설명하기 힘든 비릿하고도 기이한 기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식어버린 기름 냄새와 함께 밀려오는 이 감정은 대체 어느 심연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는 왜 닭을 '튀겨' 먹는 것일까. 단순히 미각의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일까?

내 생각은 좀 더 근원적인 곳을 향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다른 생명의 날것 그대로의 '생(生)'을 마주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근본적으로 나약하고 비겁한 존재다.

붉은 피가 돌고 뜨거운 숨을 내뱉던 그 원형의 생명력을 날것으로 직면할 용기가 없기에, 우리는 바삭한 튀김옷이라는 거창한 가면을 덧씌운다.

매콤달콤한 양념으로 그 죽음의 흔적과 비릿한 육향을 철저히 지워버리고, 우리는 생명이 아닌 시스템이 정교하게 설계해 놓은 '맛'이라는 환상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 환상 속에서 생명은 '상품'으로 치환되고, 비명은 '식감'으로 박제된다. 자극적인 시즈닝 뒤로 숨어버린 그 생명의 마지막 흔적을 우리는 애써 외면하며 탐닉한다.

기름진 상자 안에서 거칠게 굴러다니던 딱딱한 뼈를 하나씩 골라내는 행위는, 결국 그 화려한 위장술 뒤에 숨겨져 있던 처절한 생존의 흔적을 억지로 마주하는 일이다.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그 매끄럽고 하얀 뼈의 질감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전율하며 깨닫는다.

이 뼈가 지탱하던 생명에게도 분명 마당의 흙을 밟던 거친 발톱의 기억이 있었을 것이고, 동료들과 깃털을 부대끼며 체온을 나누던 고유한 삶의 우주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는 그 우주를 통째로 튀겨내어 식탁 위에 올린다. 인간이라는 오만한 계급장 하나를 달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배달 앱의 가벼운 클릭 한 번에 그 거대한 우주를 너무나 당연하게 해체하고 나의 일방적인 욕망 속으로 삼켜버렸다.

이 포식의 과정에서 생명에 대한 예우나 슬픔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직 결제 완료와 도착 알림, 그리고 문 앞의 비닐봉지 소리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단순히 도덕적 결벽증이나 채식의 정당성을 논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삶의 기저에 박혀있는 '염치'에 관한 사유다.

내가 오늘 이 고귀한 생명을 대가로 얻은 에너지를 가지고 고작 한다는 짓이 누군가를 시기하며 마음을 갉아먹거나, 의미 없는 모니터 앞에서 영혼 없이 시간을 죽이는 일뿐이었다면, 저 닭의 죽음은 너무나 처참하고 억울한 낭비가 되지 않겠는가.

생명을 집어삼키고도 아무런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이 가벼운 영혼을 어찌해야 할까. 우리의 위장은 포화 상태지만, 정작 영혼은 지독한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누리는 모든 '편리' 뒤에는 반드시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소멸'이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하며 살아간다.

나의 배부름은 누군가의 결핍 혹은 소멸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이 잔인한 공식을 부정할 수 없다. 그 희생의 지층 위에 우리는 위태로운 일상을 쌓아 올린다.

기름때 묻은 상자 속에 널브러진 앙상한 조각들이, 오늘 하루의 끝자락에 선 나를 향해 뼈아픈 취조를 시작한다.

그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을 타고 들어와 가슴을 찌른다. 이제는 지울 수 없는 기름기처럼 내 자의식 속에 그 질문이 눌러앉는다.


"내 목숨값으로 채운 그 허기를 가지고, 너는 오늘 어떤 사람으로 살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