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을 껴안는 초록의 손길, 담쟁이덩굴의 동행

차가운 시멘트 위에 피워낸,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공생의 궤적

by 풍운

오래된 빌라의 외벽이나 학교 담벼락을 가만히 응시하다 보면, 거대한 초록색 파도가 벽을 타고 출렁이는 듯한 장관을 목격하게 된다.

아무런 발판도, 움켜쥘 틈새도 보이지 않는 매끄러운 수직의 절벽을 담쟁이덩굴은 소리 없이, 그러나 거침없이 기어오른다.

햇볕 한 줌을 더 받기 위해 허공을 향해 팔을 뻗는 그 치열한 몸짓은, 마치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우리네 고단한 삶의 뒷모습을 닮아 있다.

담쟁이덩굴이 절벽을 오르는 비결은 화려한 기술이 아니라, '함께'라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강력한 원리에 있다.

줄기 하나가 길을 잃고 비틀거릴 때면 옆에 있던 잎사귀가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고, 뒤따라오는 어린순들이 지치지 않도록 먼저 앞서간 줄기가 단단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혼자라면 금방 바닥으로 추락했을 연약한 줄기들이 수천, 수만 개로 엉키고 설켜 서로를 지탱할 때, 비로소 거대한 벽면 전체를 초록으로 물들이는 기적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성공이란 나 혼자만의 힘으로 높은 곳에 도달하는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담쟁이는 말한다. 진정한 정복이란 꼭대기를 선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딛고 선 이 차가운 벽면을 따뜻한 생명력으로 온전히 껴안는 일이라고.

담쟁이덩굴에게 벽은 넘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서로의 손을 더 단단히 맞잡게 만드는 터전이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거대한 캔버스다.

그들이 만들어낸 초록의 융단은 벽의 갈라진 틈과 해묵은 흉터들을 소리 없이 덮어주며 도시의 삭막함을 묵묵히 위로한다.

담쟁이덩굴의 발걸음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비가 오면 빗줄기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잠시 숨을 고르고, 거센 바람이 불면 서로의 몸을 더 밀착시켜 폭풍을 견뎌낸다.

어떤 줄기는 너무 가늘어 도중에 말라 죽기도 하고, 어떤 잎사귀는 벌레에게 먹혀 구멍이 나기도 하지만, 담쟁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연대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죽은 줄기는 산 줄기의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주고, 구멍 난 잎사귀 사이로는 햇살이 스며들어 아래쪽 어린 잎들을 비춘다.

이토록 지독하고도 아름다운 동행이 있기에 담쟁이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 가장 높은 곳까지 자신의 영토를 넓혀갈 수 있다.

우리의 삶도 이 담쟁이의 행보와 다르지 않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우리는 때로 좌절하고 뒷걸음질 치지만, 그때마다 곁에 있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뼘을 올라간다.

나의 한 뼘이 너의 한 뼘과 만나고, 우리의 보폭이 겹치면서 절망으로 가득했던 벽면은 조금씩 희망의 초록으로 채워진다.

혼자일 때는 두려웠던 수직의 높이가, 함께일 때는 서로의 눈빛을 확인할 수 있는 안도감의 거리가 되는 마법이 일어나는 것이다.

겨울이 오면 담쟁이는 화려했던 초록 잎을 모두 떨구고 앙상한 줄기만 남긴 채 혹한을 견딘다.

하지만 그 헐벗은 줄기들은 여전히 벽에 단단히 밀착되어 서로를 놓지 않는다.

겉보기에는 멈춘 듯 보이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뿌리 끝에서부터 다음 봄에 피워낼 새로운 초록을 준비하며 서로의 체온을 나눈다.

시련의 계절은 담쟁이들의 결속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그 단단해진 결속력은 이듬해 봄에 더 폭발적인 생명력으로 피어오르는 밑거름이 된다.

담쟁이덩굴은 우리에게 '포기하지 않는 진심'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몸소 보여준다.

날카로운 칼날로도 쉽게 도려낼 수 없는 그 끈질긴 부착력은, 상대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껴안고 놓지 않는 지극한 책임감에서 나온다.

자신을 깎아내려 잡을 곳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벽면을 움켜쥐는 그 정직한 투쟁이 결국 딱딱한 시멘트 위에 초록의 숨구멍을 틔운다.

우리가 마주하는 벽이 높으면 높을수록, 담쟁이의 잎사귀들은 더욱 촘촘하게 서로를 밀어 올린다.

그것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려는 욕망이 아니라, 아무도 낙오되지 않게 서로의 발목을 붙잡아주는 가장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구원의 방식이다.

줄기 하나가 절벽의 끝에 닿았을 때, 그것은 그 줄기만의 영광이 아니라 뿌리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연결된 수만 개의 숨결이 함께 일궈낸 공동의 승리다.

이제 담벽을 뒤덮은 담쟁이를 마주할 때면, 그 찬란한 초록빛 아래 숨겨진 수많은 줄기의 고군분투를 기억하자.

나 또한 누군가의 벽을 함께 오르는 든든한 줄기가 되고 있는지, 혹은 나의 벽을 오르는 이들의 손을 기꺼이 잡아주고 있는지 가만히 자문해 본다.

우리가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한, 세상에 오르지 못할 절벽은 없으며 우리가 닿는 모든 곳은 결국 살아있는 숲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도 저 담쟁이처럼, 잡을 곳 없는 세상이라는 벽 위에 서로의 이름을 새기며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 깊은 인연을 향해 기어오른다.


어쩌면 절망이라는 이름의 벽은 우리를 가로막기 위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더 깊게 서로를 붙잡고 뜨겁게 연대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거대한 무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