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잃은 나의 ‘독야청청’

목숨을 걸고 의로움을 실현한 성삼문, 직장을 잃은 나의 ‘독야청청’

by 즐거운 사라

십수년 전, 철학적인 대화를 즐겨 하던 지인이 성삼문의 시조를 읊어줬다. 그때 처음 성삼문이라는 인물을 알았다. 그 후 성삼문의 [수양산을 바라보며] 등 다른 시조도 접하게 됐지만, [이 몸이 죽어가셔]로 시작하는 시조의 ‘독야청청’이라는 단어에 깊이 매료된 나는 불의한 상황 앞에서 항상 기도하듯 독야청청을 속삭였다.


나에게 의로움을 지킨 일은, 바로 퇴직하는 일이었다.


지방신문사에 처음 입사하고 아버지같이 나이든 사수를 뒀다. 사실상 사수라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고, 높은 직급이었지만 중간관리자가 없었기 때문에 사수라고 생각했다.


내 사수는 돌아가신 아빠와 나이가 똑같았다. 아빠는 39살에 나를 낳았는데, 사수가 아빠와 동갑이라니, 서로 얼마나 어려웠을까?


사수는 나에게 일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본부장이라는 직함으로 필드를 움직이기 한계가 있었고, 그렇다고 나를 곁에 앉혀두고 하나하나 가르치기란 당신 나이가 너무 많고, 나는 너무 어려 그 틈이 어려웠으리라.


수습기자 생활이 6개월이었다. 수습의 끝자락에 닿을 즈음, 회사에서는 정치 싸움이 시작됐다. 사내 정치질을 시작한 건 대표였다. 새로 정치부장을 데려오면서 내 사수의 영역을 뺏어 정치부장에게 맡기려 했다.


나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대표가 시키는 대로 했다. ‘사수가 나를 가르치는 데 한계가 있고, 그러므로 나도 일에 미숙하니, 노련한 정치부장을 따라다니며 배우라는 것’이었다.


정치부장은 백발에 나이는 많았지만,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다니며 한 사건에 대해 파헤쳤다.


대기업이 산하에 만든 사회적기업이 있었다. 장애인고용업체인데, 현재는 대기업 산하에서 독립해 사회적기업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의문스러운 사망 사건이 두 번이나 벌어졌다. 그 누구도 의문을 품고 기사를 쓰거나 공론화하지 않았다.


두 번째 사망자가 나오고, 우리는 취재를 시작했다. 취재를 시작하니 장애인고용회사는 바로 움직임을 보였다. 사망자와 그의 가족들은 가난한 서민이었는데, 장례식은 가장 호화스러운 특실을 사용했다. 그리고 처음에는 적극적으로 사망에 대한 회사의 대처를 문제 삼던 유가족들이 입을 닫았다. 아마 회사 측이 종용하게 유가족과 합의한 것 같았다.


그래도 취재는 계속됐다. 사망자들은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던 사람들이었다. 첫 번째 사망자에 대해 취재해보니, 기숙사 내에서 발생한 사망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이나 소방관이 출동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사망한 게 아닌데,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사망 사건이라 의문은 더 깊어졌다.


우리는 회사 사장을 만나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사장은 우리에게 돈 봉투를 건넸다. 나는 너무 당황했다. 말로만 듣던 촌지를 받는 상황을 처음 겪은 것이다. 물론, 나도 정치부장도 돈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회사는 받았다. 물론, 촌지를 받지는 않았다. 합법적으로 수천만 원의 광고료를 챙겼다. 따지고 보니, 그게 내 값어치였다.


왜냐하면, 내가 쓴 기사를 회사 측에서 막았다. 데스크는 기사 여부를 판단하기도 전에 대표와 본부장에게 내 기사를 보냈다. 본부장은 장애인고용기업의 뿌리는 지역에 깊은 연고를 두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기업이었다. 그런 대기업에게 불리한 기사를 내보내면, 회사가 광고를 수주하는 데 있어 불이익이 발생한다는 결론이었다.


나는 기사를 썼고, 또 썼다. 그러나 데스크에서 승인받지 못하고 기사가 담긴 파일은 컴퓨터 휴지통에 버려졌다.

애초에 기획 취재를 하라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대표는 다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박나는 기사를 써서 기업을 압박해 광고를 받아내던지, 기사를 출판하기 전에 기업을 압박해 광고를 받아내던지 결론은 똑같았다.

그렇게 광고로 돈을 버는 것은 양아치 같았다. 물론, 언론사는 대부분 광고료로 회사가 운영된다. 그렇지만, 정정당당하게 광고를 얻는 방법과 이렇게 지저분하게 구린 뒤를 캐서 협박 아닌 협박으로 광고를 뜯어내는 방법이 있다.


나는 그 뒤로 사수에게 반발했고, 반항했다. 기사는 묻어버려도 괜찮았다. 그러나 의로운 방법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수에게 반항하는 게 정치부장 편을 들어주는 꼴이 됐다.


대표는 그동안 사수와 정치부장 사이에 이간질을 해왔다. 사수의 출입처 몇 개를 정치부장에게 이관하고, 수습기자인 나를 정치부장 밑으로 보내자는 거였다. 그런 식으로 사수에게 압박을 줬고, 그런 식으로 정치부장을 유혹해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정치부장에게 홀랑 넘어간 모양새가 됐다. 이에 사수는 분노했다. 사내정치 문제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 사수는 지난 사회적기업 건을 들먹였다. 내가 회사와 데스크를 거스르고 반발한 점을 문제 삼아 사과를 요구했다.


그러나 나는 사과하지 않았다. 의로운 일은 취재한 내용을 기사화하는 것이었다. 의롭지 않은 일은 취재에서 밝혀진 사실을 무기 삼아 기업을 압박해 수천만 원의 광고를 받는 것이었다.


사내정치에서 사수가 정치부장을 이겼다. 대표는 잃는 것도, 얻는 것도 없었다. 그저 아닌 척 발을 뺄 뿐이었다. 대표는 나에게 사과를 종용했다. 사수에게 사과하지 않으면, 사수는 나를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사과하지 않았으므로, 회사에게 권고사직을 당했다. “죄송하다”는 한마디였다면, 퇴사 당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얽힌 일이 너무나도 잘못됐었다. 그런 잘못된 일을 사과의 명분으로 삼았으면 안 됐다.

직장을 잃었지만, 나는 그 사과하지 않은 행위가 ‘독야청청’이었다.


무의미한 사과의 결과는 회사의 어두운, 더러운 면을 보고서 그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고 승인하는 행위였다. 기사화하지 않는 회사와 사수에게 반대했다는 이유로 사과하는 것은, 그들의 방법이 옳았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았다.


비록 직장을 잃을지라도, 나는 스스로 떳떳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의 독야청청은 퇴사였다.




- 문예창작과 과제를 옮겨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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