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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쓰 Feb 18. 2022

우주를 갈 때도 더하기가 필요해

아빠는 안 갈 거야

아이에게 수학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 그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까지 배워야 이 공부를 끝마칠 수 있는지 항상 이야기를 해주고 시작한다. 왜냐고? 생각해보면 내가 그러한 이야기를 한 번도 듣지 못하고 공부를 해왔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아이는 세 자릿수 덧셈을 신나게 공부하고 있다. 원, 직사각형, 정사각형 도형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두 자리 덧셈을 풀 때는 재밌게 공부하는 아이가 세 자리 더하기 세 자리 덧셈을 공부한 이후 표정이 너무 안 좋아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아이의 마음을 너무 당연하게도 알 것 같았다. 회사에서 이것만 끝내면 큰 업무가 끝난다고 했는데 다 마치고 나니 더 큰 덩어리의 업무가 계속 밀려오는 느낌이 아닐까? 지금 숫자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온몸으로 감당하고 있는 아이는 공부가 단순히 하기 싫다라기 보다는 이 의미 없는 숫자놀음을 도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 역시 당연하다. 


어른에게는 월급이라는 아주 간단한 보상체계와 목적의식이 있다. 사고방식이 갖춰진 어른에게는 돈보다 더 효율적인 체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지금 나는 나의 생각을 정리하여 한 꼭지의 글로 옮기기에 짧으면 몇 주 길면 몇 달의 시간이 필요하지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면 하루에 열 꼭지도 작성해낼 수 있는 무한한 잠재력이 있다. 세상에 찌들지 않은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더 큰 잠재력이 있을지는 굳이 한계를 정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이에게는 금전적으로 보상체계를 줄 수가 없다. 사회에 필요한 기초지식을 쌓고 더 나은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공부를 하는 시기인데 여기까지 풀면 용돈 줄게, 여기까지 풀면 게임하게 해 줄게, 이런 식으로 보상체계를 잡는 것은 아이가 사회적 성장을 하는 것에 너무도 옳지 못한 일이다. 왜냐하면 아이가 공부를 하는 목적의식이 공부보다 더 의미가 못한 게임시간과 몇 푼의 용돈으로 폄하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새로운 단원을 공부할 때마다 이것을 배워야 하는 의미를 최대한 부풀려서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세 자리 덧셈을 할 때 아이에게 이러한 말을 해준 적이 있다. 


'네가 지금 세 자리 덧셈을 하는 이유가 뭔지 알아? 사실 너는 어떤 숫자를 더하더라도 덧셈을 할 수 있게끔 세 자릿수 덧셈을 배우는 거야. 이걸 마치면 네 자릿수 덧셈도 배워야 하고 다섯 자리 덧셈도 배워야 하고, 나중에는 열 자리 열 자리 덧셈도 배워야 할 거야. 지금은 세 자리 두 개를 더하는걸 배우지만 나중에 가면 열 자리 숫자를 열개 더해야 할지도 몰라'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아들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나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지금 하는 더하기를 하는 방법 자체는 똑같아. 세 자리, 네 자리, 다섯 자리까지 늘어날 수는 있지만 결론은 네가 어떤 덧셈을 하더라도 하는 방법을 깨우치기만 하면 덧셈을 더 이상은 배울 필요가 없어. 더 많은 계산이 필요할 때는 기계가 대신 계산을 해줄 거야. 하지만 너는 계산하는 방법까지는 알아야 한다는 거지. 네가 덧셈을 배워야 할 마지막은 거기까지야' 


아이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처음으로 공부를 끝낼 수 있는 마지막을 알았기 때문이다.


'덧셈은 많이 필요하게 될 거야. 네가 받은 용돈 모아둔 게 얼마인지 계산해볼 때도 필요하고, 달나라에 가게 될 때는 더 많은 숫자 더하기가 필요해. 나중에 네가 살게 될 아파트를 살 때도, 야구를 볼 때도, 필요하고 나중에는 달나라가 아니라 화성까지 갈 수도 있는데 그때는 더 많은 더하기를 할 줄 알아야 돼'


아들의 더하기 유니버스는 그렇게 확장되었다. 놀라운 일은 더하기 쓰임새의 유니버스는 끝도 없이 확장되었지만 아들의 공부 범위 유니버스는 처음으로 범위가 주어지며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공부는 끝도 없이 계속하는 것도 있지만, 적당한 범위가 넘어가면 다른 분야를 배워가는 것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지했을 것이다. 


공부를 본인이 하고 싶어서 찾아서 하는 사림이 있을까? 물론 그런 케이스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들은 아닌 것 같다. 어른들은 항상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 창의성이 중요하고,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고, 다양한 것을 공부하게 하고, 그런 논리를 바탕으로 수많은 책자와 교육자료를 만들어내지만 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아이에게 설명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교재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항상 그런 것이 궁금했다. 이거 배우면 도대체 어디다가 써먹는 거지? 지금 이거 배워서 의미가 있는 건가? 그런 질문을 아이가 나한테 한다면 나라고 완벽하게 백 점짜리 답변을 해주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가 끝없는 반복학습의 지겨움 굴레에 빠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저학년인 아이는 무언가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열 자리 숫자 서너 개를 덧셈으로 뚝딱 풀어내며 자랑할 때쯤이 되면 더하기 공부는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그 한계를 넘는 것은 아이의 몫이지만 그 범위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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