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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치 Jun 14. 2019

길치; 모녀 삼대 단칸방 생활시작하다.

3주간의 원룸 생활

1994년에 동네에 집짓기 붐이 인 적이 있다. 어린 나이에 듣기로 그 해에 집을 지면 좋다고 해서 온 동네 한옥들이 벽돌집으로 변신을 했었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라 공사를 단행하였고, 그 당시는 사글세를 구하기 쉬웠었지만 수요가 많은 지라 어렵게 큰 방 한칸에 다섯 식구가 지내면서 꽤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로변이라 차도 사람도 많이 다니고 사춘기에 부모님과 할머니와 한방을 쓰는 것도 불편했다. 불을 끄면 천장을 뛰어다니는 쥐들 덕에 벌벌 떨며 잠이 들었고 무엇보다 아빠와 나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책상 속에 숨겨놓은 김민종 사진을 다 버려 버린 사건은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저려온다.


두 달의 힘든 단칸방 생활을 끝내고 새로 지어 진 집에 입주 했을 때 그 기쁨이란.. 부모님은 짐도 안 들어온 집에 이틀 먼저 이불만 가지고 주무시고 오실 정도였으니 너도 나도 힘든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집이 이제 26년째를 맞으니 여기 저기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집 공사를 하기로 맘 먹었고 지금은 세 식구이니 더 쉽게 방을 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으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보증 기간 동안 세를 놓고 싶어 하지, 단기간 세는 없다며 부동산 마다 도리도리 했었다.’


결국, 에어비앤비를 알아보았으나 괜찮은 곳은 모두 나갔고 그나마 찾은 곳은 내국인은 안 받는다며 정중히 거절을 해왔다.


빨리 있을 곳을 구해야 공사를 계약할텐데 맘이 급해져, 원룸 중개 앱을 깔았으나 바로 부동산으로 연결되었고, 여차저차 굉장히 작아 맘에 안드는 방을 양쪽 복비를 모두 지불하고 나서야 한달을 얻을 수 있었다.


아이 학교랑 학원이 아니면 레지던스를 편하게 빌렸겠지만, 내가 자리를 비우면 엄마가 도보로 아이를 픽업해야 하는데 도저히 불가능하여 이렇게라도 빌려준 것에 감사하기로 하였다.



입주 날이 다가올 수록 그 코딱지만한 방에서 어찌 산담. 하며 한숨이 푹푹 나왔으나 막상 청소를 하러 가 이곳 저곳 둘러 보니 깨끗이 청소만 하면 살만 하겠다 싶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엄마와 주방 살림들과 한 사람분 족히 하는 아이의 짐들이 더해지자 여백이라곤 볼 수 없는 공간에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엄마는 가만히 계시는데 나 혼자 엄마의 살림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이거 쓰는거냐며 재차 확인하고 아니 때수건은 왜 한 봉다리나 가져오신 것인지 그렇게 짐을 줄이라 했건만 큰 김치통 가득 묵은지까지 챙기신 엄마가 조금 원망도 되었다. 


드디어 아침 일찍 철거를 위해 인부들이 오셨고 우리는 서둘러 마지막 짐을 챙겨 나왔고, 차로 한가득 싸온 짐들을 옮겨 놓으면서 다시 돌아갈 때는 꼭 원룸 이사를 불러야겠다 굳은 다짐을 했다. 그래도 밥도 먹고 바로 바로 치우니 살만 할 것도 같다.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물리적 공간의 비좁음이 문제가 아니었다.

몇 시간이 흐르고 깨달았다. 공간의 비좁음이 문제가 아닌 것을..

운동도 다녀오고 스마트 폰으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나와 달리 TV도 없고 주방에서 거의 반나절을 보내셨던 엄마는 그야말로 정말 할 일이 없으신 상태가 되었다.


움직이는 나를 보는 게 유일한 재미가 되었다 할까?

벽에 기대어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 보고 참견 하는 엄마에게 훅 답답함이 느껴졌다. 


오늘따라 물리치료도 안 가시고.. 자주 놀러 가시던 동네 가게들도 안 가시고..

결국, 엄마가 계속 쳐다보니 뭘 못하겠어. 했더니..

엄마 할게 없으셔서 그런다고 바닥을 보고 계시길래.. 아아.. 내가 또 엄마를 맘아프게 했구나.. 큰 후회가 밀려왔지만.. 5분도 안 되어 내 다리의 멍을 보시고선, "다쳤니?" 하시는 엄마,  하하.. 내가 좀 참을게요.




계속되는 외출, 그리고 엄마의 운동 시작

이 곳에 오고 하루에 7번 이상은 외출 하는 것 같다. 특히 아이가 학교 간 시간은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에 낯설어 잠을 설쳐서 피곤해도 랩탑을 싸서 외출한다. 원래는 공사하는 집 2층의 컴퓨터 방은 건드리지 않기에 가서 있을까 했었으나, 일하시는 분들이 2층 화장실을 사용하시고 중간중간 전기를 내리기 때문에 커피숍에서 시간을 떼운다. 아마 하루 중 가장 유일하게 여유로운 시간인 것 같다.


이틀 전, 학원을 다녀온 아이가 자기가 아는 놀이터가 있다며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현재 있는 곳 근처의

어린이 공원.. 오 우리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마침 약속이 있어, 엄마를 그리로 오시라 하시고 아이를 맡기고 갔는데 엄마에게도 그 곳이 맘에 쏙 드셨나보다. 근처 개천은 땡볕이라 걷기 힘드신데 산 속의 돌계단과 이어진 산책로가 운동하시기 딱 좋겠다며.. 어제부터 엄마는 그 곳으로 운동하러 다니시기 시작했다. 이렇게 우리는 오전 시간엔 서로 부딪히지 않아도 된다.




피난 다니기

우리가 집 근처에 좁으나마 원룸을 얻은 이유는, 아이의 학교와 학원 때문이기에 아이와 아이를 케어할 보호자 한명만 같이 있다면 셋이 모두 같이 있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엄마는 어제 이모네에 가셨다.


마침 이모가 경기도에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셔서 엄마께 놀러오라고 하셨었기에 겸사겸사 가셨다. 이모도 딸 둘, 엄마도 딸 둘.. 둘이 할 얘기가 아주 많을 것 같다. 그래서 귀가 가렵기 전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이와 둘이는 있을만 하다. 좁은데서도 잘 노는 아이, 바닥에서 자면 목이 안아프다고 바닥이 편하다며 바닥에서 잠도 잘 잔다. (여기 있는 매트리스는 정말 최악이다. 경추베게? 이런걸로 바꾸고 목이랑 어깨 통증이 많이 좋아졌는데 요즘은 일도 안하는데 다시 통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일, 우리는 근처 호텔로 피난간다.

일주일에 하루라도 넓고 편안한 침대에서 편안히 자고 엄마는 사우나, 우리는 수영장에서 시간도 보내고..

고급 호텔은 아니지만 어찌나 기대가 되는지.. 그리고 저녁엔 인사동 가서 맛있는 저녁도 먹어야지..


얼마만의 여가인지 모르겠다. 흑



좋은 점도 있다.

우선 동선이 짧아져서 편하다. 걸음을 걷지 않아도 빨래를 걷어서 개고 옷장에 넣는 게 가능하다.

발을 딛지 않아도 아이 시리얼을 챙겨줄 수 있다. 이렇게 몇년 살면 다리 힘이 약해지겠지만..


그리고, 적은 짐으로도 살 수 있다는 걸 미니멀리스트들의 책들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난 못할꺼라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른 짐들이 많기에 평소 옷 욕심 많은 나였지만 무지 티셔츠 몇벌, 바지 두어벌만 가지고 왔는데 매일 빨아 입으면서 잘 지내고 있다. 

내가 참 많은 걸 가지고 있었구나.. 싶고 돌아가게 되면 이 느낌 사라지기 전에 옷을 반으로 줄여봐야겠다.


생활이 심플해지는 이 느낌이 너무 좋다. 그리고 냉장고가 작으니 장을 볼 필요가 없다.

우유가 떨어지면 우유 하나만 사면 되고, 엄마의 묵은지 덕에 새로운 반찬을 넣을 공간이 없다. 

묵은지 볶음으로 하루 한번은 식사하는데 아직까진 먹을 만 하다. 그렇지만 성장기에 있는 아이는 저녁에 나가서 고기를 먹이는 걸로..


산처럼 쌓여 있는 아이 동화책도 한 권도 못 가지고 왔지만 내가 읽어주지 않는 한 아이는 거들떠도 안보기에 신경 안썼는데,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재밌게 읽는다. 


바로 큰 길 건너편 동네지만, 참 가볼일 없었는데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아서 그런지.. 몰랐던 곳 찾아내는 재미도 쏠쏠하다. 분위기 좋은 카페를 찾았는데 그건 나중에 전기 자전거 이야기 쓰면서 올려야지.


한 블럭 더 오니  노란 나리꽃이 예쁘게 피어 있다. 


잠시 물을 주러 들렀는데, 작년부터 키우던 블루베리가 많이 익었다.




살림이 작아지니 소소한 삶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일을 시작해야 하겠지만.. 

언제 다시 겪을 수 있을 지 모를 이 시간을 소중히 보내기로 다시 한번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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